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태보내사령 장위공 서희선생 봉안문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太保內史令 章威公 徐熙先生 奉安文)
명호(鳴呼), 선생(先生)은 이천인(利川人)이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정민공(貞敏公) 필(弼)의 아들이로다. 성품(性稟)이 엄격(嚴格)하고 기개(氣槪)가 과단(果斷)하였도다. 일찍이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초수(超綬)하고 누진(累進)하여 내의시랑(內議寺郞)이 되었도다. 광종(光宗) 때 사명(使命)을 받들어 송(宋)에 갔다가 용의(容儀) 법도(法度)에 맞으니 송태차(宋太且)가 가상(嘉尙)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除授)하였도다.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함에 선생(先生)이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봉산(蓬山)으로 출격(出擊)하였는데 소손녕(蕭遜寧)이 항복(降服)을 재촉(再促)함에 성종(成宗)은 서경(西京) 이북(以北)을 양도(讓渡)하려고 하였도다. 선생(先生)은 그것이 양계(良計)가 아님을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적(敵)과 교섭(交涉)할 사신(使臣)을 자원(自願)하여 적진(敵陣)에 나아갔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고구려(高句麗) 땅이 자기네 땅임을 주장(主張)하고 우리와 접경(接境)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宋)과 수교(修交)하는 고로 오늘의 출병(出兵)이 이에 연유(緣由)함이라 하니, 선생(先生)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이므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칭(稱)하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였으니 만일 지계(地界)를 논(論)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境內)에 있거늘 어찌 침식(侵蝕)이라 하는가? 수교(修交)의 불통(不通)은 여진(女眞) 때문이라. 만일 그 사이에 도거(盜據)한 여진(女眞)을 쫓고 우리 구지(舊地)를 돌리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道路)를 통(通)하게 하면 감(敢)히 수빙(修騁)하지 않으리오 하였도다. 소손녕(蕭遜寧)은 그 강개(慷慨)한 사기(辭氣)에 감복(感服)하여 드디어 거란(契丹)이 이에 응(應)하여 물러났도다. 이후(以後) 여진(女眞)을 격퇴(擊退)하고 장흥(長興)·귀비(歸匕)·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맹주(孟州) 등지(等地)에 성을 쌓아 국토(國土)를 확장(擴張)하니, 성종(成宗)은 그 공업(功業)이 가상(嘉尙)하여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제수(除授)하였도다. 아아! 선생(先生)은 오직 담판(談判)으로 거란(契丹)의 대병(大兵)을 물리쳤으니, 실(實)로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에 이만한 대공(大功)을 세우신 분이 선생(先生)을 빼놓고 또 누가 있으리오. 그 은혜(恩惠)는 바다와 같이 깊고, 그 유덕(遺德)은 태산(泰山)과 같이 높으시도다. 이에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좇아 감(敢)히 존영(尊靈)을 호국실(護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어 이에 강림(降任)하사 봉안(奉安)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