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열전
(高麗史 제94권 列傳 제7徐熙)
■ 국역본 ■
서희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염윤(廉允)이니 내의령 서필(內議令 徐弼)의 아들이다. 그는 성질이 엄정하고 성실하였다. 광종(光宗) 11년에 그의 나이 18세로서 갑과(甲科)에 급제한 후 차례를 뛰어넘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벼슬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여러번 승진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광종 23년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나라와 10여 년 동안이나 왕래가 없다가 서희가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의 행동이 절도있고 예법에 적합하였으므로 송나라 태조(조광윤)가 가상히 여기어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벼슬을 주었다. 성종(成宗) 2년에 그가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事)로 임명되었을 때 왕을 수행하여 서경으로 간 일이 있었다. 성종이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놀러 가려는 것을 서희가 글을 올려 간하니 왕이 그의 의견을 듣고 미행을 중지하였으며 그에게 안마(鞍馬)를 상으로 주었다. 그 후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개임되었다. 성종 12년에 거란이 침입하니 서희가 중군사(中軍使)로 임명되어 시중 박양유(侍中朴良柔)와 문하시랑 최량(門下侍郞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성종도 친히 방어를 지휘하기 위하여 서경으로 갔으며 안북부(安北府)로 진군하여 머물렀다.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東京留守 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함락시키고, 고려군의 선봉군사(軍使) 급사중 윤서안(給事中尹庶顔)등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더는 전진할 수 없어서 되돌아 왔다. 서희가 군대를 인솔하고 봉산을 구원하려 한 즉 소손녕이 말을 퍼뜨리기를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영유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에서 우리 강토를 강점하므로 이제 토벌하러 온 것이다.”라고 했다.
또 공문을 보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할지며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서희가 이 글을 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하니 성종이 감찰 사헌차 예빈 소경(監察 司憲借 禮賓 小卿) 이몽전(李蒙餞)을 거란의 병영으로 보내어 화의를 제의하였으나 소손녕이 재차공문을 보내기를 “아군 80만이 도착하였다. 만일 강변까지 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섬멸할 생각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몽전이 거란의 병영에 가서 침공하는 이유를 질문한 즉 소손녕이 대답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처벌을 주려고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고 말하였다. 이몽전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성종이 어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토의하였더니 어떤 자는 “왕은 서울로 돌아가고 대신 한 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고 투항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혹은 “서경 이북 땅을 적에게 넘겨주고 황주(黃州)로부터 절령(岊嶺)에 이르는 계선을 국경으로 정하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는바 성종은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에 찬성할 생각으로 서경 창고에 두었던 쌀을 모두 들어내어 주민에게 내어주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으나 그러고도 오히려 많은 쌀이 창고에 남았으므로 선종은 이 쌀이 적들의 군용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 때 서희가 말하기를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가히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만 달린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합니까? 하물며 양식이란 백성의 생명을 유지하는 물것입니다. 차라리 적에게 이용될 지언정 어찌 헛되이 강물에 버린단 말입니까? 이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고 하니 성종도 그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그만두게 하였다. 그는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나라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리 어간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고 있던 것을 광종(光宗) 때에 이를 도로 찾고 가주(嘉州) 송성(松城)등의 성을 쌓았었는데 이제 거란이 침공하는 의도는 이 두 개의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한 것이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 이것은 우리를 협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의 군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준다면 이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삼각산(三角山)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내어 주겠습니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옵건데 성상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싸움을 하게 하신 후에 다시 논의하여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또 전 민관어사 이지백(前民官御事 李知白)도 “태조가 나라를 창건한 후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보존하려는 충신이 한 사람도 없어서 갑자기 국토를 떼어 경솔하게도 적에게 주자고 하니 이 어찌 분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의 시에 ”어리고 몽매한 놈이 천리 강산을 경솔히 하니 촉한(蜀漢)의 문무백관이 초주(譙周)를 원망하였다“라고 일렀는바 이것은 초주가 촉(蜀)나라 대신으로서 후주(後主)에게 권고하여 국토를 위(魏) 나라에 바치고 천고의 웃음거리로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청컨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소손녕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하여 보십시오. 또한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하여 오던 연등(燃燈), 팔관(八關), 선랑(仙郞) 등 행사를 다시금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을 본받지 말며 그리하여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신다면 응당 먼저 신명에게 고한 연후에 항전이나 화의냐 하는 문제는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십시오.”하고 건의하였으므로 성종도 그들의 주장을 옳게 여기게 되었다. 당시 성종은 중국 풍습을 즐겨 모방하려 하였으며 나라 사람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까닭에 이지백이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한편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 오랫동안 회답이 없다하여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으나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郎將) 유방(庾方)이 맞아 싸워서 이기니 소손녕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만을 독촉하였다. 성종이 화통사(和通使-강화를 채결하는 사신)로서 합문사인 장영(閤門舍人張瑩)을 거란 진영으로 보냈더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응당 다른 사신을 보내어 우리와 면답하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장영이 다시 돌아온 후 성종이 여러 신하를 모으고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울 사람은 없는가?”고 물었으나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고 오직 서희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제가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하고 자원했다. 그래서 왕이 강가까지 나가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전송하였다.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진영으로 가서 통역을 시켜 회견하는 절차를 문의한 즉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대하여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가 대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 당하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고 반대했다.
재삼 왕복하면서 교섭하였으나 소손녕이 고집하므로 서희가 노하여 숙소로 돌아와서 움직이지 아니하니 소손녕이 내심 그의 인품이 비범하다 여기고 마침내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절차를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서희가 거란의 영문 앞에서 하마(下馬)한 후 들어가서 소손녕과 뜰에서 마주서서 읍한 후에 마루에 올라가서 동편과 서편으로 마주 대해 앉아서 담판을 시작했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또 우리나라와는 국경이 인접해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宋)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받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고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말하면 귀국의 동경(東京)이 우리 국토안에 들어와야 하겠는데 당신이 어찌하여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경내인데 이제 여진(女眞)이 그 중간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완악하고 간사스러운 행위로 교통을 차단했으므로 바다를 건너기 보다도 왕래하기를 곤란한 형편이니 국교가 개통하지 못함은 여진의 탓이다. 만일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 임금에게 전달하기만 한다면 어찌 가납하지 않으시겠는가?”고 반박하였다. 그래서 소손녕도 강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담판한 내용을 자기 나라에 보고하였더니 거란 임금(聖宗)으로부터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하였으니 그만 군사를 물리라는 회답을 받게 되었다. 이어 소손녕이 서희를 위하여 위로연을 베풀고자하니 서희가 “이번에 비록 우리나라에서 잘 못한 일은 없었다 할지라도 귀국에서 대군이 동원되어 왔으므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상하 없이 모두가 황급히 무기를 잡고 전선에 나선지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어찌 남아서 잔치를 즐기겠는가?”고 사양하였더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친목을 다지는 예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굳이 요청하므로 이를 수락하고 즐겁게 놀았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서 7일간 체류하고 돌아올 무렵에 소손녕이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예물로 주었다. 성종은 서희가 화희에 성공한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하며 강가에까지 나가서 맞아 주었으며 즉시 박양유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거란에 파송하여 친선의 뜻을 표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서희가 다시 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땅을 회복한 후 연후에 국교를 통하기로 하였는데 지금은 겨우 압록강 아래쪽의 땅을 회복했을 뿐이므로 금후 강 저편의 땅이 회수될 때를 기다려서 국교를 통하여도 늦지 않다고 사료되옵니다.”고 말했으나 성종은 말하기를 “오랫동안 왕래가 없으면 또 무슨 후환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파송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냈다.
그 후 그의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로 전직되었다. 성종 13년에 서희는 군사를 통솔하고 여진을 몰아내어 장흥(長興), 귀화(歸化) 두 진(鎭)과 곽주(郭), 귀주(龜) 두 고을에 성을 쌓고 이듬해에는 또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안의(安義), 흥화(興化) 두 진에 성을 쌓았으며 또 그 다음해에는 선(宣), 맹주(孟) 두 고을에 성을 쌓았다. 서희가 일찍이 왕을 따라 해주(海州)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유숙하는 막(幕)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서희가 말하기를 “저의 막에는 존귀하신 임금께서 들어오실 만한 장소가 못됩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술을 가져오라는 왕의 명령에 “신에게 있는 술은 임금께 드릴만한 술이 못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종이 어주(御酒)를 가져다 천막 밖에서 서희와 같이 마시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공빈령 정우현(供賓令 鄭又玄)이 당시 정사에 관한 일곱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평한 글(封事)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 바 있었다. 그래서 재상들을 모아 성종이 의논하기를 “정우현이 감히 직분에 넘치게 정사를 논하였으니 그를 처벌하는 것이 어떠한가?”하고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지당하다”고 찬성하였는데 유독 서희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로써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성종이 그의 말에 감동되어 깨닫는 바가 있어 정우현을 감철어사(監察御使)로 등용하고 서희에게는 수안(繡鞍)과 구마(廐馬)와 술과 안주 등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으며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으로 임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서희가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치료하였는데 성종이 친히 가서 문병하고 어의(御衣) 한 벌과 말 세 필필을 사원(寺院)에 나누어 주고 또 개국사에는 곡식 1000석을 하사하고 무릇 기도와 축수할만한 일을 아니 한바 없었다. 이듬해에 관리의 녹봉을 줄 때에 서희가 병이 완치되지 못하였는데 왕은 주관 부서에 “서희의 나이가 아직 죽을 때는 되지 않았으나 병으로 인하여 근무하지 못하니 치사록(致仕祿)을 주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목종(穆宗) 원년(998)에 5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부고를 받고 왕이 몹시 애도하였으며 포 1000필과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차(腦原茶) 20백각(角), 대차(大茶) 10근, 전향(旃香) 300량을 부의로 주고 예식을 갖추어 장사를 치르게 하였으며 장위(章威)라는 시호를 주었다. 현종(顯宗) 18년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그 후 덕종(德宗) 2년에 태사(太師)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그의 아들은 눌(訥)과 서자(庶子) 주챙(周行)이 있다.
서눌은 성종 15년(996)의 과거(科擧)에서 갑과로 급제 하였다. 현종조에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가 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국자제주, 지이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이 서눌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뒤 그에게 중추사 우산 기상시직을 내렸으며, 곧이어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로 임명하였다. 덕종초에 검교태사 벼슬이 더해졌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정종 때에는 판도병마사직에 올랐다.
정종이 호부낭중 유선을 거란에 보내어 그들이 국경지방 주민을 평안하게 살도록 해준대 대해 사의를 표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눌이 “몇년전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과 보루를 증축하고자 했는데, 이제 다시 화친을 맺었으니, 유선 편에 그것을 철수해주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정종 7년(1041)에 궤장을 내려주고 중대광을 더하여 주었다. 다음해에 다시 표(表)를 올려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서눌이 병에 걸려 지장사에 있을 때, 왕은 우승선 김정준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고, 임금의 옷 두벌과 곡식 천석, 말 2필을 절에 보시하면서 서눌의 복을 빌었다. 병이 심해지자 친히 와 보시고, 명령을 내려 삼중대광 내사령 벼슬을 더해주었으며, 자손들에게 영업전을 내렸다. 서눌이 죽자 왕은 애도하며 간경(簡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뒤에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선종 3년(1086)에 선황인 순종(順宗)의 시호를 피하여 원숙(元肅)으로 시호를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