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둔옹공 휘 연 행장(八世 遯翁公 諱 諲 行狀)
公諱諲利川人也徐氏遠有代序始祖諱神逸新羅末官阿干生諱弼麗朝光宗時官三重大匡內議令子熙亦官內史令封利川伯父子相繼爲名臣事俱著麗史五傳而至禮賓尹瓚娶禮部尙書許遂之女生公公於忠烈王朝登第官至執義兼知製敎而卒事蹟舊遠今不可詳謹按其家乘曰高麗自忠烈王以後干戈相績東拒倭冠南伐耽羅乃顔餘黨又侵我疆土數十年之間中外騷然閭巷不聞讀書之聲先輩頓儒老而且盡六經之傳不絶如綫時則有安文成公爲是懼建議置國學薦公及李滻李瑱李星秋適崔元冲等一經皆置兩敎授令禁學 內侍五軍三官七品以至內外生員並從而聽習焉公尤盡誠課敎不懈學徙日繁庠舍不能容如尹莘傑金承印金元軾朴理等諸儒皆出於公之門時稱博古通今之士必以公爲宗焉後當柳淸臣之構間兩宮指斥鄭瑈之姦減死流海島尋放還公歎日事非得己此豈修身誨人之道遂此退居田野不復仕自號樊溪遯翁云公娶中軍萬戶草溪鄭守琪之女生男亦以學識薦拜密直承旨孫孝孫官判司宰監事能繼祖父業曾孫愈入我朝佐獻陵叅翊戴勳封利城君禮曹判書諡良景自後子孫雖不蕃昌亦圭組相承爲世聞族鳴呼公際佛敎熾盛之時又直兵戈搶攐乃能通經博學任一世師道之責末乃指斥侫臣遯跡丘壑以保晩節公其賢乎哉觀乎此可知其人焉復何多求公之墓失而不傳不能顯刻後孫應默等懼其遺事之並泯焉將判諸譜首此以詔後俾余爲狀謹叙此如右
通訓大夫金化縣監祀溪兪星柱謹狀
둔옹공 휘 연 행장(八世遯翁公諱諲行狀) 번역문
공의 상계(上系)는 이천서씨시조(利川徐氏始祖) 신일(神逸)로부터 밝힐 수가 있는데 이 분은 신라말엽에 아간(阿干) 벼슬을 지내셨고 그 아들 필(弼)은 고려광종(高麗光宗) 때에 태사내의령(太師內議令)을 지내셨으며 그 손자 희(熙)는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으로 이천백(利川佰)에 봉해져 고려의 명신으로 부자가 잇달아 사기(史記)에 크게 실려 있도다.
예빈윤(禮賓尹) 벼슬을 지내신 친(瓚)에 이르러 예부상서 허수(許遂)의 따님을 맞이하시어 공을 낳으시니 공은 충열왕조(忠烈王朝) 때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의(執義)와 겸하여 지제교(知製敎)에 이르고 졸하시었는데 사적(事蹟)이 오래 되어 상세히 알 수는 없도다.
삼가 가승(家乘)을 살펴본즉 고려는 충렬왕으로부터 이후 수십년동안 싸움이 그칠새 없이 동쪽에는 왜구(倭冠)를 막아야 했고 남쪽에는 탐라(耽羅)를 정벌해야 했는데 이에 가세(加勢)하던 여당(餘黨)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여 나라 안팎이 몹시 시끄럽고 거리에는 글읽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문성(文成王) 안향(安珦)이 이를 두려워하여 나라에 건의하여 충렬왕30년(서기1304년)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설치하고 선비를 천거하였는데 거기에 공과 이산(李㦃) 이진(李瑱) 이성(李晟) 추적(秋適) 최원충(崔元冲) 등으로 한 경전(經傳)에 양 교수(兩敎授)를 두고 영(令)하여 내시(內侍) 오군(五軍)은 금학(禁學)하고 삼관칠품(三官七品)과 내외생원(內外生員)으로 다 따르고 강습(講習)을 받도록 하였다. 공이 더욱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시니 학도들이 게을리 아니하고 따르는 자가 많아 상사(庠舍 : 학교)에 수용할 수가 없었다. 윤화걸(尹華傑) 김승인(金承印) 김원식(金元軾) 박리(朴理) 등 여러 선비가 공의 문하(門下)에서 배출되었다. 그때에 이르기를 옛 학리(學理)에 넓고 밝으며 현시대의 경륜(經倫)에 통달된 선비로서는 반드시 공으로 마루(宗)를 이루었다 하였다. 뒤에 류청신(柳淸臣)이 임금을 배반한 난(亂)을 당하여 간사한 정유(鄭瑈)의 모함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해도(海島)에 유형(流刑)되었다가 죄없음이 밝혀져 풀려 돌아와서 공은 한탄하시기를 「몸을 닦고 사람을 가르치는 길이 이다지도 어려운고」하시면서 전야(田野)에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호(號)를 번계돈옹(樊溪遯翁)이라 하였다.
중군사(中軍使) 만호(萬戶) 초계(草溪) 정수기(鄭守琪)의 따님을 맞이하시어 낳으신 아들이 욱(勗)인데 학식이 높아 위위시승(衛尉侍丞)이라는 벼슬을 했었고 손자는 효손(孝孫)으로 벼슬이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능히 조부의 세업을 이었더라.
증손자 유(愈)는 조선태종조에 좌명공신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으며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양경(良景)으로 이후 대를 이어 벼슬이 높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명문(名門)으로 이름이 높았다.
슬프다 공이 불교가 창성하고 병란이 끊일 새 없는 시대에 처하시어 경륜(經輪)에 통달하고 학문에 박식하여 일세(一世)에 스승의 책임을 다 하시다가 간신으로 인하여 해를 입고도 시기하지 아니하시고 간사함을 피하여 권욕(權欲)을 버리고 군자의 길을 택하시어 산골에 자취를 감추어 만년(晩年)을 보내시니 어찌 어지신 분이 아니요 이로써 가히 그 인물됨을 알겠도다. 다시 무엇을 알려고 할 필요가 있으리요.
공의 묘 있는 곳이 전해지지 못해서 비를 세울 도리가 없도다. 후손에 초묵(蕉默)이라는 분등이 이 어른의 유사(遺事)를 전함을 걱정하여 장차 족보를 내려고 하면서 먼저 나에게 글을 청함에 위와 같이 지었노라.
금화현감(金化縣監) 기계(祀溪) 유성계(俞星桂) 근장(謹狀)
▶ 주해(註解) ◀
· 예빈윤(禮賓尹) : 빈객(賓客)의 연향(宴享) 대신의 공궤(供饋 : 물자보급)를 맡아보는 관청의 장으로 정3품
· 예부상서(禮部尙書) : 조선조의 예조판서와 같은 직책으로 정3품
· 집의(執義) : 고려 충열왕 때 감찰사(監察司)를 사헌부(司憲府)로 개칭하면서 중승(中丞)을 집의로 고쳤는데 정3품이었다. 공민왕 때에는 지사(知事)로 고쳤다가 다시 집의로 했다.
· 지제교(知製敎) : 왕에게 교서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보직 관직
·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 : 고려 충렬왕 30년(서기 1305년) 6월에 安珦의 건으로 설치된 유교학을 전습하는 곳
· 위위시승(衛尉侍丞) : 의장(儀仗)의 일을 보는 관청의 종6품 벼슬
· 판사재감삼(判司宰監事) : 어산물(魚産物)의 조달과 하천(河川)의 교통을 맡아보는 사재감의 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