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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2세조 ~ 8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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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통일대전 위패봉안문 삼중대광 내사령 원숙공 서눌선생 봉안문

(高麗統一大殿 位牌奉安文 三重大匡 內史令 元肅公 徐訥先生 奉安文)

 

오호(嗚呼)! 선생(先生)은 이천인(利川人)으로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 장위공(章威公) 희(熙)의 아들이요 내의령(內議令) 정민공(貞敏公) 필(弼)의 손자(孫子)로다. 성종(成宗) 때 갑과(甲科)에 발탁(拔擢)되어 목(穆)·현(顯)·덕(德)·정(靖)·4조(朝)를 역임(歷任)하시니, 조강국례(朝綱國禮)에 보우(保佑)한 공(功)이 실(實)로 많았도다. 현종조(顯宗朝)에 누천(累遷)하여 국자제주지리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가 되었는데 왕(王)이 선생(先生)의 딸을 들이어 비(妃)를 삼았도다. 곧이어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판상서사부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史部事)에 오르시고, 덕종조(德宗朝)에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加)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승진(昇進)하였도다. 정종시(靖宗時)에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를 역임(歷任)하였더니 왕년(往年)에 거란(契丹)이 압록강(鴨綠江), 동편(東便)에 성보(城堡)를 가축(加築)하고, 이제 다시 화친(和親)코자 하였도다. 이에 선생(先生)은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표(表)를 부쳐 먼저 그 성보(城堡)를 파(罷)할 것을 청(請)하게 하였도다. 병(病)이 위독(危篤)하자 임금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내사령(內史令)을 가(加)하고, 그 자손(子孫)에게 영업전(營業田)을 하사(下賜)하였도다. 급졸(及卒)에 왕(王)이 애도(哀悼)하고 간경(簡敬)이라 증시(贈諡)하였다가 뒤에 정종조정(靖宗朝廷)에 배향(配享)하고 원숙(元肅)이라 개시(改諡)하였도다. 삼대(三代)가 나란히 재상(宰相)에 오르고 시호(諡號)와 묘식(廟食)이 또한 그와 같으니, 그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은 별빛처럼 빛나고, 그 영명(令名)과 훈업(勳業)은 천추(千秋)에 유전(遺傳)하는도다. 이제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제사(諸士)의 의논(議論)이 제발(齊發)하여, 수년(數年)만에 통일(統一)동산에 터를 잡아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을 장엄(莊嚴)하게 세웠도다. 천만성예(千萬姓裔)는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政府機關)은 이에 찬조(贊助)하였도다. 위로는 우주(宇宙)의 원기(元氣)를 지탱(支撑)하고, 아래로는 산하(山河)의 정기(精氣)를 포섭(包攝)하였도다. 송악(松嶽)은 아련히 구름 위에 솟아있고, 한수(漢水)는 도도(滔滔)히 대(臺)를 안고 흐르도다. 전우(殿宇)가 사위(四圍)에 흘연(屹然)하니, 성충현공(聖忠顯功)의 거동(擧動)이 여재양양(如在洋洋)하도다. 조두(俎豆)는 고법(古法)을 좇고 행사(行祀)는 태묘(太廟)에 준(準)하도다. 이제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정결(淨潔)히 예제(醴齊)를 갖추어 감(敢)히 존영(尊靈)을 치국실(治國室)에 봉안(奉安)하나이다. 바라옵건대 향축(香祝)이 구천(九泉)에 응(應)하거던 이에 강림(降臨)하사 이에 명례(明禮)를 흠격(歆格)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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