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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2세조 ~ 8세조

2015.08.12 17:57

정민공 휘 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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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敏公 諱 弼 行蹟

 

公諱弼唐天復元年辛酉生高麗太祖惠宗定宗光宗公性通敏始以刀筆進累官至太師內議令光宗朝賜宰臣王咸敏皇甫光謙及公金酒器公獨不受曰臣謬居宰輔己叨寵恩又賜金器愈懼踰分且服用明等衰奢儉闕理亂臣用金器君將何用光宗曰卿能不以寶爲寶余當以卿言爲寶公嘗進見曰願上莫賞無功無忘有功光宗黙然翌日臣問有功無功者爲誰對曰有功者元甫寔會是也無功者若輩是也其以此奏時光宗厚待投化漢人擇取臣僚第宅及女與之一日公奏曰臣居第稍寬願以獻焉王問其故對曰今投化之人擇官而仕擇屋而處世臣古家反多失所臣愚誠爲子孫計宰相居第非其有也及臣之存請取之臣以祿俸之餘更營少第庶無後悔王怒然卒感悟不復奪臣僚第宅又內廐馬死光宗欲罪主者公引孔子不問馬之說爭之主者得免其賽諤如此光宗年乙丑秋七月卒年六十五諡開國貞敏公累贈三重大匡太師內史令後配享光宗廟庭(高麗史)

 

정민공 휘 필 행적(貞敏公 諱 弼 行蹟) (번역문)

 

공(公)의 휘는 필(弼)이다. 당(唐)나라 천복원년(天復元年) 신유(辛酉)년에 낳으시어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네 임금을 섬기셨다. 公의 성품(性品)은 통민(通敏)하셨으며 도필(刀筆)로 시작(始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태사 대광 내의령(太師大匡內議令)에 이르렀다. 광종(光宗) 임금이 어느 때 재신(宰臣) 왕함민(王咸敏)과 황보광겸(皇甫光謙)과 公에게 금(金)으로 만든 주기(酒器)를 하사(下賜)한 일이 있었는데 公이 홀로 받지 아니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신(臣)이 재상(宰相)의 자리에서 임금을 잘 도우지도 못하고 총은(寵恩)을 받고 있음도 황송(惶悚)하온데 이제 金술잔을 주시매 이르러서는 더욱 두렵고 분수(分數)에 넘침을 통감(痛感)할뿐만 아니라 하물며 복식(服飾)이나 기용(器用)에는 등급(等級)을 밝혀야 할 것이요 사치(奢侈)와 검소(儉素)함에는 나라의 치란(治亂)에 매인 것인바 만일 신하(臣下)로서 金 그릇을 쓰게 된다면 임금께서는 장차 어떠한 것을 쓰시려 합니까”하시었다. 광종은 크게 감탄(感歎)하여 “그대가 능(能)히 어느 보물(寶物)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니 나는 의당히 그대의 이 아름다운 말로써 보배로 삼으려 하오”하였다.

 

어느날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원하옵건데 上께서는 공로(功勞)없는 자에게 상(賞)을 내리시지 마시고 공로(功勞)있는 이들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광종은 묵묵히 생각하다가 그 다음날 근신(近臣)을 보내 “공(功)이 있는 자와 공(功)이 없는 자는 누구를 두고 일음이요”하고 물었다. “공로있는 이는 원보(元甫)와 식회(寔會)요, 공(功)이 없는 이는 너희들을 가리키는 바이니 솔직하게 이 말을 王에게 아뢰어 달라”라고 하시었다. 그때 광종이 투하(投下)한 한인(漢人)들을 후대(厚待)하여 신료(臣僚)들의 집과 女人을 골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公은 “臣의 집도 약간 넓사오니 이에 바치고자 하옵니다”하고 아뢰자, 광종은 그 까닭을 물었다. “이제 투화(投化)한 자들이 좋은 벼슬자리를 골라 차지하고 좋은 집만 찾아들고 있음으로 이 나라의 고가세신(古家世臣)은 도리어 있을 곳을 잃어가오니 臣의 어두운 소견(所見)으로는 진실로 자손의 뒷일을 위하여 꾀하옵건대 재상(宰相)이 살고 있는 집을 지탱(支撑)하기 어려울 것을 알게 되었사오니 請하옵건대 臣이 살아 있을 때 거두어 주시면 臣은 미리 남은 녹봉(祿俸)으로서 다시금 작은 집을 세워 후회(後悔)없게 하려 하옵니다”라고 서슴치 않고 대답을 하시었다. 광종은 얼핏 노여웠으나 마침내 깨달은 바 있어 다시금 臣下들의 집을 거두지 않았다. 또한 궁내(宮內) 마구간에 말이 죽으매, 광종은 그 일을 맡은 자를 벌(罰)하려 하였다. 公이 곧 공자(孔子)께서 마구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이 상하지 않았나를 물었으나 말은 묻지 않았다는 고사(故事)를 들어 논쟁(論爭)을 거듭하여 마침내 면죄(免罪)하게 하였으니 그 곧음과 과감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公은 광종 16年 을축(乙丑 서기965) 7月에 춘추(春秋) 65세(歲)에 별세(別世)하시니 나라에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두산(京畿道 驪州郡 金沙面 象頭山) 묘좌원(卯坐原)에 정중히 예장(禮葬)하였다. 王은 公에게 정민(貞敏)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여러차례 증직(贈職)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 내사령(內史令)에 이르렀고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부인(夫人)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대사간(大司諫) 황윤(黃允)의 따님이며, 묘(墓)는 쌍봉(雙封)으로 모시었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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