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아간대부 이천서공 휘 신일 신도비명
(新羅阿干大夫利川徐公諱神逸神道碑銘)
이천(利川)으로 본관(本貫)을 하는 이 신라(新羅) 때 휘 신일(神逸)을 시조(始祖)로 하니 흥덕왕(興德王)에서 효공왕(孝恭王)까지 十二조를 역사(歷事)하여 관(官)이 아간(阿干)에 이르셨다. 오호라, 공이 누조(屢朝)에 역사(歷事)함에 그 충언(忠言)과 의적(懿蹟)은 이루 다 계수(計數)하지 못할 것이나 천년 이래에 국도(國都)의 변환(變換)이 한두번이 아니며 세대(世代)의 치란(治亂)이 다만 십백(十百)에 그치지 않어 사서(史書)의 궐실(闕失)이 많고 문헌(文獻)의 징빙(徵憑)이 없어 그 전(傳)함이 무기(無幾)하니 어찌 통한(痛恨)치 않으리오.
지금 그 전(傳)하는 바를 약필(略筆)하면 나실(羅室)이 이미 운흘(運訖)함에 소소(宵小)가 조정(朝廷)에 영만(盈滿)하여 천청(天聽)을 옹폐(擁蔽)하고 그 현덕(賢德)을 창오(娼娛)하니 모든 사독(邪毒)이 공에게 모이므로 공이 국가에 장차 화(禍)있음을 알고 이천(利川) 효양산(孝養山)에 은둔(隱遁)하여 포의하립(布衣荷笠)으로 효양거사(孝養居士)라 자칭하며 날로 천석간(泉石間)에 소요(逍遙)하여 미록(糜鹿)으로 벗을 삼고 상양자적(徜徉自適)하셨다. 이때에 불법(佛法)이 대치(大熾)하여 그 폐습(弊習)이 풍미(風靡)하므로 공이 우려(憂慮)하여 이에 희성당(希聖堂)을 복축(卜築)하고 후학(後學)을 장진(獎進)함으로써 기임(己任)을 삼음에 제자(弟子)가 초진(超進)하여 횡사불용(黌舍不容)하니 시년(是年)이 七十四세라.
공이 사속(嗣續)이 없이 상려(喪儷)하니 정상(情狀)이 참연(慘然)하므로, 공의 제(弟) 신통(神通)이 그의 자(子) 목(穆)으로 계후(繼後)하려 함에 공이 가로되 「천륜(天倫)을 빼앗음은 인정(人情)이 아니다」하고 마침내 듣지 않으니 문인(門人)이 간(諫)하기를 「목(穆)으로 후사(後嗣)를 삼지 않아서 선생 백세후에 가사(可祀)를 의탁(依託)할 바 없으리니 재취(再娶)하여 농장(弄璋)을 기망(期望)함이 가(可)합니다」하여 공이 이에 응(應)하고 드디어 택배(擇配)하여 합천홍씨(陜川洪氏) 찬(贊)의 딸을 맞이하다.
일일(一日)은 공이 산곡간(山谷間)에서 부장반환(扶杖盤桓)함에 홀연(忽然)히 일록(一鹿)이 대시내투(帶矢來投)하므로 곧 발시전약(拔矢傳藥)하고 적고중(積藁中)에 은익(隱匿)하니 엽자(獵者)가 색멱부득(搜覓不得)하고 돌아갔다. 양구(良久)에 공이 방록(放鹿)하며 말하기를 「심림(深林)에 들어가서 이구(爾軀)를 선보(善保)하라」하였더니 야몽(夜夢)에 일신인(一神人)이 고(告)하되 「녹(鹿)은 오자(吾子)이라. 공이 능히 구활(救活)함매 마땅히 공의 자손(子孫)으로 하여금 재보(宰輔)가 상승(相承)케 하리라」하더니 비로소 태경(胎慶)이 있어 일자(一子)를 낳고 재명년(再明年) 임술(壬戌:九○二)에 八十六세로 졸하니 효양산(孝養山) 자좌원(子坐原)에 봉장(奉葬)되셨다. 아들 필(弼)은 모씨(母氏)의 교도(敎導)로 대기(大器)를 이루고 고려조에 입사(入仕)하여 벼슬이 내의령(內議令)에 이르며, 시(諡)는 정민(貞敏)이요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손자 희(熙)는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고 시호(諡號) 장위(章威)이니 성종(成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증손 눌(訥)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시호(諡號) 원숙(元肅)이니 정종묘정(靖宗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차(次) 유걸(維傑)은 우복야(右僕射)시오, 차(次) 유위(維偉)는 장야서령(掌冶暑令)이요, 차(次) 주행(周行)은 달성(達城)에 이거하고, 눌(訥)의 딸은 현종(顯宗)의 후(后)가 되었다.
운잉(雲仍)이 번연(繁衍)하여 방국(邦國)에 포만(布滿)함에 기려불억(其麗不億)이니 지분파별(支分派別)하여 달성(達城)·부여(扶餘)·장성(長城)·연산(連山)·평당(平當)·당성(唐城)·남평(南平)으로 나뉘고 공의 기혈(氣血)을 선수(禪受)하지 않음이 없으나 병선(兵燹)을 누경(屢經)하여 참작고증(參酌考證)함에 빙거불명(憑據不明)하여 다만 기소거(其所居)로 관(貫)함만을 추찰(推察)하겠으니 또한 이에 당연함이다. 달성(達城)은 이계(二系)가 있으니 경파(京派)는 군기소윤(軍器少尹) 한(閈)으로 중조(中祖)를 삼고 향파(鄕派)는 진(晉)으로 중조(中祖)를 삼으며, 남평(南平)은 영평감무(永平監務) 인(鱗)으로 중조(中祖)를 삼고, 부여(扶餘)는 또한 이계(二系)가 있으니 일은 온조(溫祖)로 중조(中祖)를 삼고 일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존(存)으로 중조(中祖)를 삼으며, 연산(連山))은 보(寶)로 중조(中祖)를 삼어서, 육파(六派)의 소관(所貫)이 불일(不一)함이 한(恨)이나 백천(百川)은 귀해(歸海)하고 낙엽(落葉)은 귀근(歸根)함이 자연(自然)의 이(理)이니 어찌 후세(後世)의 자손(子孫)이 그 소자출(所自出)을 알고 불기이합(不期而合)하지 않을는지 알리오.
이제 감무공(監務公) 휘 인(鱗)의 二十二세손(世孫) 상록보(相錄甫)가 적루(積累)한 집에 나서 모선(慕先)하는 성력(誠力)이 간지(懇摯)함으로 다년(多年) 경영(經營)하여 거화(巨貨)를 내고 공의 묘도(墓道)에 비(碑)를 세워 의절(儀節)을 갖추려 함에 궁석(穹石)을 천리(千里)에 수운(輸運)하고 불녕(不佞)의 무필(蕪筆)로 광잠천유(光潛闡幽)코자 하니 초손(肖孫)의 효사(孝思)를 누가 흠감(欽感)하지 않으리오. 공의 활녹치상(活鹿致祥)한 음휴(蔭庥)는 장자 천지(天地)와 더불어 무폐(無弊)할 것이니 공의 묘(墓) 또한 천지(天地)와 더불어 유구(悠久)하리라. 명(銘)하여 가로되
나라에 대로(大老)있어 수(壽)하고 또 안강(安康)하며,
황유(皇猷)를 보불(黼黻)하니 음소양장(陰消陽長)하도다.
국사(國事)가 대류(大謬)함에 내권이귀(內卷而歸)로다.
후학(後學)을 장진(獎進)하여 규구(規矩)에 어김이 없도다.
년노무사(年老無嗣)함에 활록몽웅(活鹿夢熊)하니
효공성시(孝恭盛時)에 악강걸웅(嶽降傑雄)이로다.
홍천(洪川)이 영사(瀯泗)하여 효강(孝岡)과 상응(相應)하니
유택(幽宅)이 이에 있어 휴분무강(鑴賁無强)이로다.
檀君紀元 四千三百年 丁未 十一月 日立
國務總理 東州 崔斗善 撰
安東 金忠顯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