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세손 중시조(中始祖),
상서공(尙書公) 린(隣)의 발자취
공의 이름(諱)은 린(隣)이다. 고려 고종 9년(1222) 태어나 고종조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중랑장(中郞將, 정5품 무관, 장군 다음) 병부상서(兵部尙書, 병부의 정3품) 대광(大匡, 정2품)내의령(內議令, 내의성 종1품)에 이르렀다. 그런데 간신 권함(權咸)의 모함에 빠져 영평(永平 지금의 전남 南平)의 감무(監務, 작은 현의 으뜸벼슬, 조선시대의 현감과 같다)로 좌천되었다.
공은 감무로 있으면서 위문(衛門) 밖에 혜궁관(惠窮館)을 세우고, 늙고 아내 없는 홀아비(鰥), 젊고 남편 없는 과부(寡), 어리고 어버이 없는 고아(孤), 늙고 자식 없는 노인(獨) 같은4가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려내어 옷과 먹을 것을 주고 보호하였으며, 또 다섯 가지 농사짓는 법(五農法)을 만들어 농민에게 보급하고 가을에 거두어들인 결과에 따라 상을 주었는데 상장 밖에 덧붙여 주는 상으로 최고 병역을 면제해 주기까지 하였다. 이를 시행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부유하게 되었다. 또 불교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에 불교행사는 절에서만 하도록 했으며, 특히 유업관(儒業館)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한 달에 세 사람씩 뽑아두었다가 1년에 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조정에 소개하여 쓰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영평에는 문물이 크게 번성하였다. 지방풍속이 불교만 숭상하고 유교 예절을 모르므로 제사예절부터 가르쳤고, 또 임신부가 가난하면 출산에 필요한 해산쌀을 내려주니 출산하는 사람은 모두 인(隣)할아버지 덕택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임무를 맡은 지 10년 만에 자리를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고을 백성들이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눈물로써 길을 막으며 못 가게 하였다. 공이 떠난 뒤 고을 백성 모두가 공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공을 축원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삼중대광(三重大匡, 최고 벼슬인 정1품)의 자리를 놓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으니 수충협모좌리공신(輸忠協謀佐理功臣)으로 기록하여 실었다. 충렬왕 31년(1305)에 돌아가시니 뒤에 고을 선비들이 고을선생으로 그 덕을 추모하여 철야(鐵冶)에 철천사(哲川祀)를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아내는 남평 윤씨이고, 외아들이 있다.
(이천서씨 난정공파보 '행록'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