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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질문과 답변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어찌하여 봉황(鳳凰)이라는 큰 지명이 붙게 되었을까? 또 지역이름에 쇠붙이를 녹인다는 뜻의 철야(鐵冶)란 이름이 붙었을까? 고려말에 지은 종가가 남아 있다는 750년 역사의 철야마을을 찾아가면서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봉황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으로 54개 부족국가 중 불미지국(不彌支國)이었으며, 백제 때는 실어산현으로 철야마을에 현청을 설치했던 곳이다. 철야라는 지명은 이곳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제철을 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철야마을 앞길은 옛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로 마동이란 마을에서 말발굽을 바꿔 끼고 갔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철야에서 농기구나 말발굽 같은 것을 만들던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봉황은 덕룡산(400m)이 전역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산줄기에서 시작한 유곡천, 영산천, 봉황천, 만봉천이 영산강을 향하여 흘러간다.

한편, 나주는 백제 때 순우리말인 ‘발라’라고 불렀으며 전국을 9조 5소경으로 나눴던 통일신라시대 때는 발라주가 되었고 얼마 후 발라군으로 강등되었다, 통일신라 말 경덕왕시절 발라를 금성으로 바꿨는데 혼란을 틈타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철야마을은 나주 남평에서 국립나주병원을 지나 세지면으로 가는 지방도 55호선 왼쪽에 있다, 지금은 자동차 전용도로와 연결되는 신 지방도 55호가 생겨 봉황면 소재지 입구에서 좌회전하면 마을까지 신작로가 잘 포장돼 있다. 멀리 산 아래 앉은 마을의 형세가 오랜 역사의 흔적을 말해준다.
지방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금하로를 따라 가면 끝에 철천리 유촌과 등내, 수각마을이 맞붙어 있다. 동북쪽으로 옹굴재를 넘어가면 선동마을이다. 수각에서 덕룡산의 한치재를 넘으면 다도면의 암정리고, 돈밭굴재를 넘으면 신동리에 이른다. 옛날에는 12개 마을을 합해 철야라고 불렀다.

등내는 주로 이천서씨(利川徐氏), 수각은 진주정씨(晉州鄭氏)가 살고 있다. 서씨는 1270년께 서린(徐鱗)이 들어와 터를 닦았고 정씨는 16세기 중엽에 정종요(鄭宗堯)가 입향하였다. 정종요는 함평 월야에서 살다가 각동리 안골 서인수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철야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진주 정씨는 수각마을에 많이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후 이천 서씨와 진주 정씨는 봉황의 대성(大姓)으로 발전했다.

750년 역사의 종가 원형 보존

철야에는 이천서씨의 종가가 남아 있는데 건축연대는 남송시대 8대 임금인 영종(1195~1224 재위)때로 예측된다. 이는 묘우(廟宇)의 상량문에 ‘唯宋嘉定’이란 송나라의 연호가 기록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종가도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도 원형의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송진이 많이 나오는 관솔이어서 오랜 세월을 이겨낸 것이다. 한국의 고대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위에는 재실이 있는데 100여년 전 신축한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26세 종부가 집을 지키고 있다.

이천 서씨의 종가는 전란과 일제치하를 지나면서도 온전히 보전되었는데 이는 칡덩굴로 둘러싸여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또한 입향조 이후 28세까지 한 번도 종가에서 절손되지 않고 대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곳 서씨 집안에서는 양택 명당으로 얘기한다.
이천서씨가 철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270년대 경이다. 입향조 서린(徐鱗, 1227~1305)은 고려말 병부상서를 지냈다. 권함의 모함으로 영평(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풀렸으나 올라가지 않고 철야( 각동리 내동)에 터를 잡고 말년을 지내 이천서씨 상서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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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정



전라도 지역에서는 서 린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2세가 수(秀, 1276~1338), 3세가 희준(希俊, 1306~1362)이며 4세가 도승지를 지낸 운(暈, 1346~1432), 5세가 남원부사를 지낸 호(顥, 1390~1461)이다.

6세부터 파조형성 전라도에 흩어져

호는 효리(孝理. 1412~1465), 효주(孝宙, 1414~1470) 효환(孝豈, 1417~1476), 효당(孝堂, 1419~1498)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6세가 각기 파조를 형성했다. 효리는 예롱공, 효주는 수롱공, 효환은 점롱공, 효당은 익롱공으로 부른다.
막내인 익롱공이 또 보(補) 우(祐) 지(祉) 상(詳)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인 지(祉)가 문과에 급제해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낸 난정공(懶亭公, 1468~1537) 이다. 난정공의 아들이 8세 혼(渾)으로 그 자녀들이 전라도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된다. 장남 욱(別)은 전북 임실, 둘째 할(腱)은 광주 매곡동, 셋째 적(勣)은 나주 철야, 넷째 칙(勅)이 순천·광양으로 이거해 세거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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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역사의 철야서씨 종가



이후 8세 옥(沃)은 무안 현감을 지냈는데 동생을 무안(지금의 함평)으로 저금내보내고 자신은 고향인 철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함평의 학다리와 손불 등지에서 살고 잇는 서씨들이 연(演)의 후손이다.
9세인 송촌(松村) 서정후(徐廷厚, 1565~1593)와 11세손인 심암(心菴) 서진문(徐振文, 1564~1593)이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철야에서는 7세 난정공 서지(徐祉, 1468-1537)], 8세 진사공 서척(8세, 徐滌), 9세 서눌 (徐訥) 등이 태어나 누정에 대한 창시 및 중수 등의 역할을 했다.

13세 매학(梅壑) 서봉령(徐鳳翎, 1622~1687)은 조선중기 대학자인 은봉 안방준의 문인으로 ‘매학유고(梅壑遺稿)’를 남겼다. 원래 본집 15권과 부록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권15 「존문록(尊聞錄)」과 부록만이 전한다. 목차에 따르면 권1~4에 시, 권5에 소(疏), 권6~8에 서(書), 권9~10에 별지(別紙), 권11에 잡저, 권12에 휴암선생입사실기(休庵先生立祠實記), 권13에 불립당사우연원후(不立黨師友淵源後)·잠(箴)·명(銘)·송(頌)·제문·축문, 권14에 상량문·행장·유사, 권15에 존문록과 부록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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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민이 세원 서상록 공적비



「존문록」은 스승 안방준에게서 들은 학문 강론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에는 조상우(趙相愚)가 쓴 연보와 종사록(從師錄)·동유록(同遊錄)과 윤증(尹拯)이 쓴 유사,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장, 윤상익(尹相翊)이 쓴 추장(追狀), 유지빈(柳之彬) 등이 지은 제문 등이 있다.
순천·광양문중에서는 370년 전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에 운양재(雲陽齋)를 건립, 9세 칙으로부터 선조들을 배향하고 있으며 15세 세중(1680~1757)이 광양에 입향 하여 다섯 아들을 낳은 뒤 세가 크게 늘었다.

가문을 일으킨 난정공
전라도 관찰사·형조판서 지내

가문을 일으킨 난정공은 단종 때 장릉절의(莊陵節義) 유명한 사롱공(四聾公) 가운데 넷째 익롱공(益聾公) 효당(孝堂)의 3남으로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이조전랑,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1515년(중종 10년) 중종비 장경황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박상(朴祥) 김정(金淨) 등이 중종반정으로 폐출된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려고 상소했다가 파직되어 유배를 당한 일이 있다. 이때 우의정 정광필(鄭光弼) 정민공 안당(安塘)등과 왕 앞에 나아가 이 일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했다가 이행(李荇)을 비롯한 반대파들의 규탄을 받고 철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고향에 정자를 지어 난정(懶亭)이라고 편액하고 같은 시기에 봉황의 오림에서 귀향살이 하는 눌재 박상을 찾아가 교유하는 등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정은 지금 흔적도 없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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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천사



난정공은 얼마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형조판서,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동중추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훗날 이조판서 등으로 숭배되지만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을 비롯한 제현들의 일로 나아가지 않고 향년 67세로 별세해 다도면 구봉산에 안장돼 있다.
생전 가까이 지냈던 눌재 박상(朴祥), 1474(성종 5)~1530(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담양부사 나주목사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으며 조광조 선생으로부터 단경왕후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는 충언이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에 제향 되었다, 그의 조카가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으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난정공은 난정원운(懶亭原韻)이란 문집을 남겼는데 이는 김안국, 눌재 박상 등과 주고받은 우국충정의 글이다.

난정원운
산종운주세연륜(山從雲住勢硏倫)
산을 따라 머문 구름 굽이굽이 이어가고
입좌추광벽만건(入座秋光碧滿巾)
방안으로 스며든 가을빛 두건을 파랗게 물들이네
풍정죽담단취적(風淨竹潭團翠跡)
잔잔한 연못 위로는 비취빛 그림자 모여들고
우회난원읍방진(雨回蘭福奭芳塵)
난초밭에 내리는 비는 향기로운 먼지를 적신다
옥퇴학배경동귀(玉槌鶴背驚桐鬼)
거문고가락 은은하게 울러퍼지는 가운데
아사용두환국신(鴉瀉龍頭喚麴神)
술병 기울여 홀로 마시는 술
다병일생관약과(多病一生關藥塗)
평생동안 신병으로 약과 더불어 지내온 몸
소심비시소군민(小心非是小君民)
소심하게 물러나 살고 있지만 백성들을 잊은 것 아니라네

김안국은 난정공의 운을 받아 이렇게 답한다. 글 속에 나오는 갈천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이상적 정치를 펼쳐 태평했다고 하는 성군(聖君)을 일컫는다.
제시재략광군륜(濟時才略冠群倫)
세상을 구할만한 재략을 갖춘 분이
잠조환경일폭건(簪組還輕一幅건)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돌아왔구나
공파직심구조계(拱杷直尋求早計)
일찍이 나라의 동량으로 많은 공을 세웠건만
배장방촌수미진(背將方寸受微塵)
언제나 뒤로 머물며 겸허하게 살았었네
행장탄탄영유아(行藏坦坦寧由我)
나아가고 물러남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인데
훼예분분왕비신(毁譽紛紛枉費神)
시비가 분분하여 마음만 상하는구나
부귀핍신추불거(富貴逼身椎不去)
부귀가 가까이 있어도 밀어내고 나아가지 않으니
여햐평지갈천민(如何平地葛天民)
갈천씨의 백성으로 평범하게 살아간들 어떠리

또 눌재 박상은 난정의 난정공을 찾아와 이렇게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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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에 있는 나지공 묘소



동민남주사(同旻南州士)
한 임금을 섬겼던 남쪽의 선비
성조미갈충(聖朝未竭忠)
아직도 충성할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생평심내사(生平心內事)
한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일은
요대고인짐(聊對故人斟)
옛 친구를 만나 대작을 하고 있네

이천 서씨가 서씨들의 大宗

여기서 잠시 한국의 서씨들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의 서씨들은 이천 서씨(利川 徐氏)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구 서씨, 달성 서씨, 연산 서씨, 남양 서씨, 장성 서씨, 전주서씨 등은 이천 서씨의 별파이다.
이천이란 본관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한주(漢州)의 황무군(黃武郡)을 통과할 때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이천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서목은 서씨들의 시조인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왕건을 만났는데 군대가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와 지명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해지고 지명도 이천(利川)으로 고쳐졌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주부 이천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고 1996년 이천시로 승격되었다.

이천 서씨는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한다. 신라 제52대 효공왕(897~912) 때 아간(阿干)을 지내다가 나라의 운이 다함을 알고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는 80세에 서필(2세, 徐弼)을 낳았고 이후 서희(3세 徐熙)-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3세 서희(942~998)로 993년(성종 12)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물리쳤다. 이듬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였으며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 이르렀다.

서희의 동생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徐鈞)이 판장각감사, 현손인 서공(徐恭)이 평장사에 올랐으며, 서순(徐淳)은 지추밀원사를 역임하는 등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에 제향됐다.
이천 서씨는 서신일, 서목, 서필, 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 서존, 서균 서린, 서원 서공, 서성, 서순, 서숭조, 서능, 서신계, 서린, 서원경, 서충, 서윤, 서신, 서호 등 명재상을 14대 대대로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한편, 대구 서씨는 이천서씨 7세조 한(遽)의 후손으로 3정승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 3대제학(서유신, 서영보, 서기순)을 6대 연속 배출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徐閑)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달성서씨는 이천 서씨에서 분파하여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 재상 서진, 서기준, 서영, 서균형을 배출했으며 주로 경상도에서 산다.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10월1일에 이천 효양산 부발읍 산촌리 산21에서 거행된다. 달성 서씨는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이천 서씨는 경기도 이천시를 본관으로 하지만 의외로 전남, 광주광역시에 많이 살고 있다.

무안 장성 순창은 절효공 서릉의 후손

한편, 전남 무안 몽탄과 장성, 순창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서씨들은 나주 철야와는 다른 계보다. 이들은 절효공 서릉(節孝公 徐陵, 이천서씨 10세)을 중시조하며 무안 몽탄이 장남, 장성이 둘째, 순창이 막내로 알려지고 있다. 무안에는 몽탄면 봉명리·대치리·내리 등지가 집성촌이며 장성은 북일면 성덕리, 그리고 순창은 유등면 유촌리가 세거지다. 장성의 후손들은 북일면 성덕리에 용전사를 설립해 고려 고종 때의 효자 서릉 등을 향사했으나 현재는 후손들이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후 무안과 장성의 이천서씨 후손들은 순창의 화남사에서 향사한다.

서릉은 조선 세종임금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의 4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는 대표적인 효자다. 고려 고종이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조선 선조 11년 (1578년)에 서릉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를 장성 북일면 박산리에 세웠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용전사가 세워지기 훨씬 전인 1587년 장성군수 이계(李啓)가 중심이 되어 북일면 모암리에 장성 최초의 서원인 모암서원을 설립, 서릉을 주벽으로 추담 김우급, 하곡 정운용, 아곡 박수량, 조영규-조정노 부자 등 6분을 추배했으나 대원군 훼철 당시 위패를 땅에 묻고 호패비석과 모암서원 유허비 등을 남겨두었다.

순창의 서씨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지낸 서영우(徐永佑, 1605~?)의 후손들이다. 무안에서 순창으로 처음 이거한 사람은 16세 덕경으로 알려진다. 서영우는 순창 출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집안의 후손들과 마을사람을 거느리고 남원의 모의소(慕義所)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후 충주 목사를 역임했다. 이후 유촌(柳村)의 유계(柳溪) 위에 정사를 짓고 강론하며 후학을 가르침으로써 그를 유계라 칭했다.
이들은 1948년 유촌에 화남사(華南祠)를 건립하여 고려 고종(1214~1259)때의 인물인 서릉(徐稜)과 서식(徐湜), 서숭로(徐崇老) 서영우(徐永佑)를 배향하고 있다. 서릉은 장성출신으로 고려 고종(1214~1259) 때의 이름난 효자이며 서식(徐湜)은 임란의병, 서승로(徐崇老, 1422~?)는 예조참의, 서영우(徐永佑)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철천사와 만호정 (挽湖亭)

철천사(哲川祠)는 고려 병부상서(종일품) 서린(徐鱗)을 봉향한 사우로서 등내마을에 위치한다. 철천사는 1794년 지역의 유림들이 세운 사당으로 입구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철천사에는 서린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향사일은 매년 음력 3월 9일이다. 바로 아래에는 강당이자 회의장소로 사용하는 영덕재(永德齋)가 있다.

만호정은 고려중엽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992년 전남도 유형문화재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형 구조다. 현 위치의 북쪽에 있는 연포(冽浦)에 고려조 때에 세운 쾌심정(快心亭)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한다. 현재의 만호정은 개축과 보수를 거듭하는 중에도 쓸 만한 옛 기둥이나 널판지를 재사용해 1천여 년이나 된 오래된 “나무의 해골(?)”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만호정에서는 향약 및 동규(洞規)를 시행 하였는데, 그 내용이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에 전한다. 그러나 만호정으로 개칭한 연유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철야 대동계에서 관리했으며 현재는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호정의 축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5점의 누정중수기릍 통해 고려 때의 정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 정도홍(鄭燾洪, 878~1951)이 쓴 <쾌심정 중수기 등에 따르면 처음에는 원일정(遠日亭)으로 불리어지다가,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그리고 만호정(挽湖亭)으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영평정은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이곳으로 옮겨지으면서 부른 이름이다. 만호정기에는 만호정에서 계를 만들어 운영하였던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옛날 나의 종증조 판서공[判書公, 서지(徐祉, 1468-1537)]을 비롯한 족조 진사공[進士公, 서척(徐滌)], 숙부 진사공[進士公, 서눌(徐訥)]이 연이어 태어나 이 누정에 대한 창시 및 중수 등의 모든 역할을 하면서 별도의 규약을 만들어 영구보존의 기초를 다졌다”라는 내용이 있다. 참고로 철야 마을은 예로부터 서씨와 정씨가 마을 구성원이 되어 서로 혼인하였는데, 이 때문에 정도홍은 위의 세 사람을 종증조, 족조, 숙부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정철환(봉황면장)의 만호정기 병제(挽湖亭記幷題)에 의하면 1967년 영평정을 중수하고 37년 후에 다시 누정을 보수하면서 만호정(挽湖亭)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만호정기 병제는 1967년에 정철환(鄭喆煥), 여창현(呂昌鉉), 홍석희(洪錫憙)가, 1971년에 서요(徐琵)가 각각 썼다.
<만호정기병제>에는 “누정에는 예로부터 10가지 조목의 향약이 있었으나 한결같게 백록동 규약(白鹿洞規約)과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또한 팔경이 있었는데 덕룡산의 갠 달빛(龍山霽月), 금성산의 저물녘 노을(錦城晩霞), 매 봉우리의 아침햇살(鷹峰朝陽), 여우 고개의 저녁노을(狐峴落照), 수정의 맑은 바람(藪亭淸風), 연포로 돌아가는 돛배(冽浦歸帆), 옥등에서 타는 거문고(玉嶝彈琴), 웅사의 저녁 종소리(熊寺暮鍾)이다”라 하였다.(중략)

“마을의 여러 유생 중에 금하 서상록(錦下 徐相錄)은 우리 마을의 인망(人望)인데 이미 창고와 돈주머니를 기우려 향토 사업에 수고로움을 다하였다. 또 이 누정이 날이 갈수록 황량해지는 것을 개탄하여 큰돈을 투자하여 전깃불을 가설하고, 이어서 국내 명문가의 시문을 모아서 그 문미를 화려하게 하며,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 점은 그 뜻이 근면한 것이니 또한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말미에 7언 율시의 시를 남겼다.

만호정 우뚝 솟아 덕룡산 누르고
湖亭突兀壓龍岡
산과 물 호남의 제일 고향이라네
山水南來第一鄕
서씨 아이 정씨 장정의 풍치 고풍스러운데
徐孺鄭莊風韻古
신라 누각 고려 나무 세월 갈수록 화려하네
羅坮麗樹歲華長
고관대직으로 백세 보내니 문하생 번성하고
簪纓百世蕃桃李
밭 갈고 베를 짜며 온 집안 뽕밭에서 늙어가네
棘織千家老拾桑
큰 전란 넘어간 마을을 수호하는 느릅나무
護社搭楡經浩光
지금까지 꽃과 잎사귀 향기 뜨락에 가득하네
至今花葉滿庭香
<호남지방 문헌연구소 나천수 譯>

향복당 정준일 부자 용산사에 배향

16세기 중엽 정종요(鄭宗堯)가 서인수의 딸과 결혼하여 철야에 들어온 뒤 수각마을에 이거하여 큰 성을 이뤘는데 유명인물이 향복당(向北堂) 정준일(鄭遵一, 1547~1618)과 그의 아들인 초심당(草心堂) 정현(鄭晛, 1570~1616)이다.
정준일은 남평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제봉 고경명 선생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자 합세하여 맏아들 정현과 조카 정사(鄭賜) 등과 함께 종군하였으며 금산(錦山)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의 의병으로 참가한 이들의 충절과 도학을 기리기 위해 1722년 나주 삼포면에 세워진 풍산사(楓山祠)에서 배향되어 오다가 1946년 덕룡산 난봉하에 용산사(龍山祠)를 부설하여 향북당과 정현 부자의 충절과 도학을 추모하고 있다.
정준일은 쾌심정을 새로 이건하는데도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도흥이 쓴 쾌심정중수기(快心亭重修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쾌심정에서의 수계(修己)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단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수계의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중략) 이에 향북당 정준일(向北堂 鄭遵一, 1547~1618)이 옛날의 이러한 유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였다.(중략) 금년(1930년) 가을에 여러 동인(洞人)들이 중론을 모아 이 누정을 언덕 사이로 이건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완성을 하였다.

이 누정의 낙성식과 중양절 연회가 맞물려 거의 3천여 명의 계원(己員)이 모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중략) 다만 이 누정의 옛날 이름이 쾌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르는 것이 당연의 일이라 할지라도 이미 옛날의 그 터가 아닌 새 자리에 오늘의 이 누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 이름에 있어서도 새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여, 이 고을이 별호(別號)인 영평(永平)이라는 두 글자로 이 누정의 이름을 정하게 된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어 쾌심정에서 영평정으로 개명한 연유를 알 수 있다.

정준일은 임란당시 관군과 힘을 합하여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의 병이 깊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아들 정현을 보내고 낙향해야 했다. 분함을 삭히려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후 향북당(向北堂)과 덕룡학당(德龍學堂)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쓰며 지냈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나 향북당선생유고(向北堂先生遺稿)를 남겼는데 광주읍성내 객사에 오르며 읊은 시(次光山客舍韻) 등이 전하고 있다.
年過半百髮絲絲
나이가 반백을 지나 머리카락도 가늘어졌다.
不用荒城滯一摩
그러니 황폐한 성에 지방관으로 머물러 무엇하리
東閣梅花聊相折
동각엔 매화꽃이 피어 꺾을 만하다.
故園知發數層枝
고향 정원에도 몇 가지 피었으리라는 것을 알겠다

철야마을 곳곳에 비석과 비각 남아

철야에는 만호정, 철천사, 용산사 등의 유적이외에도 많은 비석과 비각, 정려 등이 남아 있다.
이천서씨 제각인 원념제(遠念齊)는 매학(梅壑) 서봉령(徐鳳翎, 1622~1687), 동강(東崗) 조상우(趙相愚)를 배향하는 사우이며 용강사(龍岡詞)는 8세 송정(松亭) 서옥(徐沃. 8세)의 제실로 속칭 래접제각(來蝶祭閣)이라 불린다. 또 19세 경암(敬庵) 서복기(徐復基, 1846~1906)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덕룡산 아래에 설단한 중봉단(中峰壇), 효자 서치백실적비 (孝子 徐致백 實蹟碑)도 눈길이 간다. 21세인 서치백(1860-1942)은 수롱공 후손으로 생후 4, 5개월에 양친을 여의고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의서를 공부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고 자신의 회갑날 상복으로 갈아입고 선친묘에서 3년 시묘하여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열부해남 윤씨정려 (烈婦海南 尹氏旌閭)는 결혼 5개월 만에 남편상을 당하자 발인제를 지낼 때 결혼예복으로 갈아입고 목을 매어 따라 죽었다. 1783년에 정려를 배명하였다 한다.
진주정씨 정열각(晉州鄭氏旌烈閣)은 진주정씨 문중에 시집와서 열부의 행적을 남긴 남평문씨와 파주염씨의 열행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유촌 마을에 세웠다.
서장흠시혜비(徐章欽施惠碑)는 20세 서장흠(1868~1949)이 대지주로서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감면해 줘서 소작인들이 1913년에 세웠다.
이밖에도 동초정공철환기적비(東樵鄭公喆煥紀蹟碑) 남천 서선생강학비(南川徐先生講學碑), 금하서공상록향토개발기적비(錦下徐公相錄鄕土開發記蹟碑), 청강선생서공우흠경모비(晴崗先生徐公于欽景慕碑) 등이 서 있다.

금하 서상록 선생의 고향사랑

근세의 인물가운데선 22세 금하(錦下) 서상록(徐相錄, 1910~1996)을 잊을 수 없다. 재일교포 기업인으로 성공해 고국과 고향, 그리고 문중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적인 업적이 금하장학회를 설립해 돈이 없이 공부를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도왔고 나주시민회관 건립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을 쌓았다,
그는 수원(水元)의 2남 6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나주향교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16세 때 혼자서 일본으로 떠나 탄광광부와 봉제공작 직공을 하면서 주경야독하여 실력을 쌓았다. 만학으로 오사카 관서공업학교를 졸업하고 28살 때 나고야 이천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회사이름도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이천으로 명명했다. 이후 39살 때 이천전기, 48세 이천제강을 설립, 그야말로 철야(鐵冶)의 후손으로서 성공하게 된다, 이후 이천물산, 이천중기. 알프스스틸 등을 창업,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회사를 창업하기 전 일본의 철강회사에 일했는데 특수한 기술을 개발해 해군성에 납품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러나 늘 이웃주민들과의 화합을 실천해 일본에서도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항시 기업인으로서 고국과 고향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했다.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광목 20만필을 대한민국정부에 기증해 헐벗은 국민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도록 한 것을 비롯해 마산에 방직공장, 인천에 이천전기를 세우는 등 고국의 발전에 적극 앞장섰다.
훌륭한 정신과 사명이 나라에 알려지면서 해방직후 이승만 정권 때 상공부장관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기업인은 기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산에 방직공장, 인천에 이천전기 공장을 설립,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특히 고향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사재로 철야마을 진입로를 매입해 군(郡)에 기부채납하고, 리 단위에서는 전국 최초로 철야마을에 전기를 끌어다 불을 켜주었다. 시골마을에 공동전화기를 개설했는가하면 1975년 금하장학회를 만들어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60여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나주 남산공원에 금하회관을 건립하여 군(郡)에 기부채납 해 현재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주고등학교 교사 신축, 봉황면 복지관 건립, 만호정 보수 등 많은 일을 했다. 이 같은 업적으로 지난 1984년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받았다.

금하선생은 고향 마을 진주 정씨 정봉금(鄭奉今)여사와 결혼해 일본에서 살면서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다. 장남 의열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부친의 뒤를 이어 금학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둘째 형렬은 일본에서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금하는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나주 동신대학 부근에 선조들을 모시는 경애원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봄, 여름이면 학생들의 소풍처로 활용되는 등 사후에도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었다. 경애원에는 나주시민들이 세운 금하선생 공적비가 있다.
금하장학회 서정도(徐正道) 사무국장은 “금하선생의 좌우명은 자력 자립, 자주의 정신으로 모든 자기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광양, 함평, 등지에도 집성촌

함평에도 학교면과 손불에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함평에서는 한글서예로 이름을 떨친 22세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1934~ 1995)이 있으며 손불에서는 현재 삼군사관학교 교장인 육군소장 서정열(23세)이 있다. 평보 서희환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세종대학교수로 재직 중 타계했다. 국민교육헌장 원본을 비롯해 정몽주 선생 동상문, 행주산성 전첩비문 등 많은 비문을 썼다. 점릉공파 후손으로는 장성출신의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서욱 육군 중장(24세)이 있다.
순천·광양쪽은 칙의 후손으로 일본 와세다 출신의 서성호(22세) 서두열 전 한국통신 사장(23세) 의료계의 서민범 여수c.s병원장 (23세) 등이 있다.

이번 ‘전남의 마을 1박 2일’ 취재에 맞춰 철야마을에 관한 유래와 철야서씨 관련 자료를 제공한 서상승(22세), 서맹열(23세) 옹은 “세상이 너무 급히 변하는 사람에 선조들의 발자취를 제대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매우 안타깝고 죄스럽다.”면서 “불완전하나마 이번에 새롭게 정리된 기록을 토대로 문중의 역사를 다시 써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순천·광양문중 대표격인 서상희(22세)씨는 “외세의 침략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 전란 등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뿌리를 잃어버린 아쉬움이 크다.”면서 “만시지탄이지만 젊은 후생 가운데 몇 명이라도 가문의 역사를 바로 알고 전하는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고려시대 석조여래입상·마애칠불석상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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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석불 칠불



▲ 미륵사 = 고려 54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창룡사(蒼龍寺) 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무속인이 거주하면서 미륵당이라 불렀다. 1990년대 후반 원일스님이 부임한 후 중창 불사를 단행, 현재의 웅장한 모습을 갖췄다. 조계종 18교구 백양사의 말사다.
대웅전 뒷편 산중턱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46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羅州 鐵川里 石造如來立像)이 있다, 높이가 5.38m 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큰 돌에 불신과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발목까지 늘어진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두 팔은 두꺼운 옷자락 때문에 양 손만이 드러나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리고, 왼손은 위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는 배(舟) 모양이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몸광배에는 구름무늬를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입상 중 보기 드문 보물로 70년대에 발견 했다.
철천리 석조여래입상(鐵川里 石造如來立像) 오른편 아래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461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석상(鐵川里 磨崖七佛石像)이 자리하고 있다. 불상은 고깔모양의 바위에 7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바위 꼭대기에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한다. 불상의 높이는 95cm이다. 동쪽 면과 북쪽 면에는 좌불상이 있는데 북쪽 면의 것은 합장(合掌)하고, 남쪽 면에는 네 분의 부처님이 서 있는 것으로 조각되어 있다. 서쪽 면에는 원래 두 분의 부처님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득남, 발복 을 바라는 이들의 손길에 닳고, 풍화로 인해 희미하게 지워져 가고 있다,



▲ 토속마을 = 나주시 봉황면 봉황로 214(010-3627-8211)
염소탕집이다. 나주 봉황에서 직접 흑염소를 길러 요리하는데 염소를 기를 때부터 좋은 사료를 먹여 냄새를 제거하는 등 사육단계부터 신경을 쓴다. 염소농장은 업주의 부친이 직접 기르고 부부가 18년째 식당을 운영한다. 봉황에서 태어나 50년 넘게 살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면사무소나 농협 등에서도 자신 있게 추천하는 봉화의 맛집이다. 수육이 부드럽고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탕에 넣어주는 고기도 푸짐하다. 부추나 시래기를 듬뿍 넣고 들깨가루를 넉넉히 넣어 먹으면 탑탑한 맛이 일품이다. 염소탕집이기 때문에 반찬이 많이 올라오지는 않지만 안주인이 자신 있게 내놓는 묵은김치와 된장맛이 그만이다. 수육(대) 55,000원, (소) 40,000원, 염소탕(특) 17,000원, (보통) 12,000원이다.

글 : 지형원<문화通 발행인> 사진 : 임철진<사진작가. 편집위원>

 

 

http://www.mtong.kr/read.php3?aid=155729185716589m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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