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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장위공 서희선생

2015.08.12 18:35

설봉서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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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서원기(雪峰書院記)

 

이천(利川)은 여주(驪州)와 광주(廣州) 두 고을 사이에 있는 백리(百里)도 못되는 지방(地方)으로서 그 읍(邑)의 서북(西北)족에 설봉산치(雪峯山峙)가 있고 복하(福河)는 동서(東西)쪽에 흐르고 있다. 기후(氣候)는 온화(溫和)하고 토지(土地)는 기름져서 이미 말한 두 고을과는 견줄 바가 아니요 실로 경기도지방(京畿道地方)에서 보기 드문 곳이다. 그러므로 고려(高麗)로부터 국조(國朝)에 이르기까지 대표적 인물(代表的 人物)은 인생(人生)에 큰 뜻을 품은 비상(非常)한 재목(材木)으로 된 명공(名公)과 석유(碩儒)들로서 자기(子器)들의 거처에서 생(生)을 즐기고 살았으니 이 고장의 풍속(風俗) 인심(人心)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세상도의(世上道義)는 타락하고 인심과 풍류도 옛날과는 같지 않아 이 고장을 다스리는 수령(守令)들은 오히려 다스리기가 어려워짐을 한탄하였던 것이다. 나의 선조(先祖)들은 여러 세대(世代)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까닭에 조상(祖上)들의 분묘(墳墓)도 많으며 안팎의 후손(後孫)들이 잡다하게 모여 살아 그 수가 수백가구가 되는데 나는 바로 이러한 고을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은 덕(德)이 박하여 이들을 감화시키지 못함이다. 남몰래 그 까닭을 생각해보니 옛사람들은 이 고을에서 선생(先生)이 죽으면 반드시 그를 추모하는 행사(行事)로 그의 사당(祠堂)에 제사(祭祀) 지냄으로써 풍속(風俗)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것인데 우리 고향에도 그렇게 할만한 인물(人物)이 어찌 없을까보냐. 이에 나는 이 고을 노사(老師)와 숙유(宿儒)들과 상의하여 이를 확정(確定)하였다. 이리하여 얻어진 인물(人物)로서 고려(高麗)에는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신 서공(徐公)과 본조(本朝)에서 징사(徵士)로 있던 이공(李公)과 더불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김공(金公)을 들 수 있는데 이중에서 어떤 분은 사직(社稷)을 보존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은혜(恩惠)를 입혔으며 어떤 분은 경(經)에 밝고 도(道)를 닦았으며 어떤 분은 학식(學識)이 넓고 도(道)를 지킨 분이라. 옛 말에 삼불후무괴(三不朽無愧 : 언제까지나 썩지 않은 세가지 덕(立德立言立功))라는 말이 있거니와 이는 바로 이러한 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공(徐公)은 이천서씨(利川徐氏)로서 휘(諱)는 희(熙)요 자(字)는 광윤(光允)이며 가계(家系)는 본부(本府)의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의 아드님으로 고려(高麗) 광종(光宗) 임금 때 갑과(甲科)에 합격(合格)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으로서 송(宋)나라에 갔을 때 그의 용의(容儀)가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아 송(宋)의 예조(藝祖)는 이를 매우 중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벼슬을 내렸다. 성종(成宗) 임금을 섬김에 있어 항상(恒常) 충언(忠言)과 도리(道理)에 어긋나지 않은 언행(言行)으로서 좌우에 시종하였다.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80만(萬) 대군(大軍)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군신(軍神)이 모두 당황하여 국토(國土)를 잘라 적(敵)에게 내주려고 하였는데 공(公)은 홀로 그 부당(不當)함을 통렬히 반박하고 비분강개하여 말로서 소손녕과 담판할 것을 청하여 임금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홀로 적진(敵陣)에 들어가 당당(堂堂)한 논리(論理)와 적실한 구변(口辯)으로 소손녕을 감복하게 하여 80만(萬) 거란군(契丹軍)을 물러가게 하여 고려(高麗)으 사직(社稷)을 보전(保全)하였으니 이는 보로지 공(公)의 힘이 아니고 누구의 힘이겠는가. 그 후 공(公)은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성곽(城郭)을 튼튼히 쌓아 삼한(三韓)의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가 상공(相公)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임금은 장위(章威)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고려왕씨(高麗王氏)의 사당(祠堂)에 모셨는바 이것이 아직도 폐지되지 않았으니 이 어찌 다행(多幸)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공(李公)의 휘(諱)는 관의(寬義)요 자(字)는 의지(義之)인바 광주이씨(廣州李氏) 일찍이 초시(初試)에 합격(合格)하여 명성(名聲)이 널리 퍼졌으나 그 후 10여 차례에 걸쳐 치른 과거(科擧)에서는 합격(合格)을 못하고 시골에 물러나 전원(田園)에서 도(道)를 즐기고 살았는 바 이 소문은 자세하게 퍼졌을 뿐만 아니라 이 고을은 이 분에 의하여 감화된 바가 크다고 한다. 그 후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에게 찰방(察訪)을 맡겼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시골로 돌아왔었다고 한다. 공(公)의 나이 75세(歲) 때에 임금이 공(公)을 불러 성리학(性理學)의 강의를 들었으며 또는 천지도수일월성진세차역법(天地度數日月星辰歲差歷法) 등(等)의 자연법칙(自然法則)을 물었을 때 공(公)의 설명(說明)은 너무나 상세했던 것이라 성종(成宗)임금은 크게 칭찬하면서 장차(將次) 높은 벼슬자리에 쓰고자 하였으나 공(公)은 나이가 많다 하며 이를 사양하고, 시골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임금은 의복(衣服)과 곡식(穀食)을 하사(下賜)하고 공(公)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후(後)에 공(公)의 아드님이 높이 되자 임금은 공(公)에게 최고(最高)의 관직(官職)을 주었으니 덕(德)을 심은 보람을 얻은 것으로서 이와 같은 분에게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었으랴. 김공(金公)의 휘(諱)는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향(國鄕)이며 호(號)는 모재(慕齋)이고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였으며 남들이 이를 알아 잘 대우하였던 것이다. 중종조(中宗朝)에 그가 배운 바를 크게 펼쳐 나가던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집에서 지내면서 수십년간 이 고을의 후생(後生)들의 훈도(訓導)에 힘을 써서 그의 덕(德)을 더 한층 빛냈던 바 공(公)의 문하(門下)에서 도리(道理)를 터득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을 소환하여 병국{秉國 : 찬성(贊成)의 별칭(別稱)} 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 등의 중직(重職)을 맡겼던 바 공(公)은 유교문화(儒敎文化)를 더욱 빛내고자 스스로 문장을 맡았으며 그의 문장은 멀리 중국(中國)에까지 칭찬이 대단했으며 그가 나라를 염려하는 글은 임금께서도 여러번 칭찬하였다. 사림(士林)들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러 받들었으며 공(公)이 세상(世上)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인종묘(仁宗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위에 적은 분들은 다 세상(世上)을 바로잡은 분들로서 재조(材操)와 공적(功績)이 뛰어나게 방책(方冊)에 적혀있고 그 덕행(德行)이 뭇사람의 이목에 퍼져있어 이것은 비단 나 한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이는 한 고을의 공지된 여론이요 또는 한 고을 한 때의 여론만이 아니라 실은 한 나라 만대(萬代)의 공론이니 이네 이 고을 선비들은 이분들을 위한 사당(祠堂)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하여 마침내 갑자년(甲子年) 2월(月)에 이천읍(利川邑) 동쪽 오리(五里)쯤 되는 안흥지(安興池) 옆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祭祀)를 지내기 시작(始作)했는데 매년(每年)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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