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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장위공 서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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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공 휘 희 신도비문(章威公 諱 熙 神道碑文)

 

이제 이 팔척(八尺)의 높은 비(碑)를 고려(高麗) 명신(名臣) 서장위공(徐章威公)의 신도(神道)에 삼가 세운다. 公의 휘(諱)는 희(熙)요 소자(小字)는 염윤(廉允)·광윤(光允)이요 장위(章威)는 시호(諡號)이다. 내의령(內議令) 필(弼)의 아들이요 대사간(大司諫) 황윤(黃允)의 외손(外孫)이다. 公은 고려초(高麗初) 정치(政治)의 혼란(混亂)한 때를 당하여 뛰어난 담력(膽力)과 지극(至極)한 충성(忠誠)과 민첩한 책략(策略)과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외교이론(外交理論)으로써 능(能)히 잃었던 국토(國土)를 회복(恢復)하여 500年 왕업(王業)을 굳은 초석(礎石) 위에 올려놓은 문무지용(文武智勇)이 출중(出衆)한 어른이다. 이에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公의 열전(列傳)을 상고(詳考)하여 몇가지 대절(大節)을 뽑아 서술(敍述)하기로 한다. 公이 일찍이 18歲에 갑과(甲科)에 올라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으로서 왕명(王命)을 받들어 송(宋)에 갔을 때 그 용의(容儀)가 법도(法度)에 맞았으므로 송(宋) 태조(太祖)가 가상(嘉尙)하여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의 직(職)을 내렸고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였을 때에는 중군사(中軍使)로 북변(北邊)을 지켰다. 적장(敵將) 소손녕(蕭遜寧)의 80만대병(萬大兵)이 국경(國境)에 이르러 정세(情勢)가 심(甚)히 위급(危急)하매 성종(成宗)이 군신(群臣)을 모아 의논(議論)하니 혹(或)은 솔군걸강(率軍乞降)을 주장(主張)하고 혹은 평양이북(平壤以北)의 땅을 떼어 줄 것을 주장(主張)하였다. 성종은 장차 할지(割地)의 의논(議論)을 쫓아 평양(平壤)의 곡창(穀倉)을 헐어 백성(百姓)에게 흩어주고 나머지를 대동강(大同江)에 던지려 하였을 때 公은 홀로 반대(反對)하였다. 먹을 것이 족(足)하면 성(城)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싸움이 이길 수 있으며 싸움의 승부(勝負)를 결(決)코 병력(兵力)의 강약(强弱)에만 매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틈을 잘 타서 움직임에 있을 따름이요, 하물며 곡창(穀倉)은 백성(百姓)의 명맥(命脈)인만큼 설사 이적(利敵)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헛되이 강(江)에 던지는 것은 천의(天意)에 어긋나는 일임을 먼저 역설(力說)하고 또 국토(國土)를 적(敵)에게 갈라주는 것은 만세(萬世)의 수치(羞恥)는 일일뿐만 아니라 고구려(高句麗)의 옛 강토(疆土)를 저희 국토(國土)라고 말하는 적(敵)이 장차(將次) 삼각산(三角山) 이북(以北)의 땅을 다 요구(要求)할진대 이도 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 임금은 서울로 돌아가고 신료(臣僚)는 머물러 있어 적과 한번 싸움한 연후(然後)에 다시금 의논(議論)하여도 늦지 않을 것을 주장(主張)하였으니 그 애국단충(愛國丹衷)은 실로 저 창공(蒼空)에 밝은 별처럼 반짝였다. 과연(果然) 성종의 그때 마음을 감동(感動)시켜 할지(割地)의 의논(議論)을 깨치었다. 그때 전민관어사(前民官御使) 이지백(李知白)이 성조(聖祖)가 창업(創業)하여 대통(大統)을 드리워 오늘에 이르렀는데 한 사람의 충신(忠臣)도 없이 문득 경솔하게 국토(國土)를 적에게 주려함을 개탄(慨歎)하여 은연(隱然)히 公을 여초유일(麗初唯一)의 충신(忠臣)으로 찬양(讚揚)하였다. 북변(北邊) 봉산군(蓬山郡)을 공파(攻破)하고 우리 선봉장(先鋒將)을 나포(拿捕)한 적장(敵將)은 기세(氣勢)를 더욱 높여 우리가 사방(四方)을 통일(統一)하는데 귀부(歸附)하지 않는 者는 기어코 소탕(掃蕩)하고 말 것이니 속(速)히 투강(投降)하라고 강요(强要)함에 먼저 화통사(和通使) 장영(張瑩)을 보냈더니 소손녕(蕭遜寧)이 대신(大臣)이 아니면 면대(面對)하지 않겠다고 거절(拒絶)함으로 성종(成宗)은 군신(群臣)에게 누가 능(能)히 적진(敵陣)에 가서 강적(强敵)을 물리치고 만세(萬世)에 공(功)을 빛낼 수 있겠는가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公이 홀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국운(國運)과 함께 한 몸을 다할 것을 결심(決心)하고 적진(敵陣)에 뛰어 들기를 자원(自願)하니 성종은 강두(江頭)에까지 나아가 公의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 公이 소손녕(蕭遜寧)과 만날 때 정배(庭拜)를 고집하자 公은 노(怒)하여 두 나라 대신(大臣)이 서로 만나는 이 자리에 무슨 뜰아랫절을 하란 말이냐 하여 거절(拒絶)하고 객관(客館)에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마침내 서로 정손례(庭損禮)로서 동서(東西)에 마주 앉았다. 公은 소손녕(蕭遜寧)의 강폭(强暴)한 물음에 대하여 차분한 반박(反駁)으로 완곡(婉曲)히 달래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터전으로 삼았음으로 나라 이름도 고려(高麗)라 하였고 막상 국경(國境)을 논(論)한다면 귀국(貴國) 동경(東京)도 우리 경내(境內)에 들어 있었던만큼 어찌 우리가 침식(侵蝕)을 하였다 이르겠으며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이 모두 우리 경내(境內)이지만 여진(女眞)이 그곳을 몰래 점거(占據)하여 교린(交隣)의 길이 끊어졌으니 만일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강토(疆土)를 돌리어 길이 트인다면 두 나라의 구화(媾和)는 저절로 이룩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사기(辭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소손녕이 역시(亦是) 억지로 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잔치를 열어 위로(慰勞)하려하매 公은 우리나라가 비록 아무런 잘못이 없으나 귀국(貴國)과의 풍운(風雲)이 급(急)한 이 마당에 어찌 차마 잔치를 즐길 수 있겠는가 하여 부드럽게 거절을 하였으나 소손녕은 이것은 두 나라 교환(交驩)의 예(禮)임을 내세워 관대(款待)하였다. 公이 7日 동안 묵고 돌아올 제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頭와 비단 500필을 예물(禮物)로 실렸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여 강두(江頭)에까지 나와 맞이하였으며 그 뒤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昇進)되었다. 후(後)에 公이 임금에게 아뢰어 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장흥(長興) 등 네 진(鎭)과 곽주(郭州) 등 네 주(州)에 성(城)을 쌓아 마침내 국토(國土)의 회복(恢復)에 성공(成功)하였다. 또 성종을 모시고 해주(海州)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군막(軍幕)에 드시려할 때 公은 임금이 거동할만큼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理由)로 왕의 행행(行幸)을 간곡(懇曲)히 중지시켰다.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論)하였는데 성종은 우현(又玄)의 월직(越職)한 죄(罪)를 물으려함에 군신(群臣)이 모두 이의(異議)가 없었으나 公은 홀로 오늘날에는 간관(諫官)이 별도로 없는 만큼 월직(越職)이 무슨 잘못이며 臣이 부재(不才)로서 아무런 하염도 없이 재상(宰相)의 자리를 외람히 차지하여 낮은 직(職)에 있는 이로 하여금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論)하게 하였사오니 원컨대 臣에게 벌(罰)을 내리시고 우현(又玄)에게는 논사(論事)의 절실(切實)한 아름다움을 포상(褒賞)하심이 마땅하옵나이다하여 충간(忠諫)을 기우려 하료(下僚)를 구(救)하였다. 성종은 깨닫고 우현에게는 감찰어사(監察御使)에 탁용(擢用)하고 公에게는 안마(鞍馬)와 주과(酒果)를 내려 위로하고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에 승진(昇進)시켰다. 뒤에는 公이 개국사(開國寺)에서 양병(養病)할제 성종(成宗)이 거둥하여 문병(問病)하고 어의(御衣) 한 벌과 말 세필을 사원(寺院)에 나누어주고 특(特)히 벼 1000石을 개국사(開國寺)에 시사(施捨)하여 그의 회복(回復)을 빌었고 치사(致仕)의 녹봉(祿俸)을 내렸다. 公이 태조(太祖) 임인(壬寅)에 나서 목종(穆宗) 무술(戊戌) 7月 14日에 57歲로 서거(逝去)하였다.(주1) 나라에서 두터운 부물(賻物)을 내려 여주(驪州) 상두산(象頭山) 갑좌(甲坐)에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뒤에 태사(太師)에 가증(加贈)되어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마전(麻田) 숭의전(崇義殿)과 이천(利川) 설봉서원(雪峯書院)에 모셨으며 을유(乙酉) 광복후(光復後)에 이천군민(利川郡民)이 동상(銅像)을 세워 公의 거룩한 공적(功績)을 추앙(推仰)하였다. 부인(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는 군기감사(軍器監事) 식(湜)의 딸이니 묘(墓)는 쌍봉(雙封)되었고 아들 내사령(內史令) 눌(訥)과 현손(玄孫) 평장사(平章事) 공(恭)이 모두 현달(顯達)하였으며 후손(後孫)이 심(甚)히 번연(繁衍)하였다.

 

고려(高麗)가 창업(創業)된 뒤 충신(忠臣)하나 없다드니

신천(神天)이 보우(保佑)하사 이 어른이 나시거다.

담략(膽略)이 뛰어나고 국난(國難)에 과감(果敢)하며

세치의 짧은 혀로 강적(强敵)을 물리치고

국토(國土)를 찾아돌려 반석(盤石) 위에 올렸으니

거룩하신 그 공적(功績)이 만대(萬代)에 빛나리라.

상두(象頭) 높은 봉우리에 씩씩한 넔 모셨으니

이 땅덩어리 다 하도록 수호신(守護神)이 되시리라.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 근찬(謹撰)

김충현(金忠顯) 근서(謹書)

단기(檀紀) 4306年 癸丑10月 日

후손(後孫) 준산(準珊) 성환(成煥) 상록(相錄) 근립(謹立)

 

 

※ 주1 : 이 신도비에는 계묘(癸卯)에 나서 목종(穆宗) 무술(戊戌) 72756로 서거(逝去)하였다. 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추(秋)7月 경오(庚午)에 태보 내사령 서희 졸(太保內史令徐熙卒)로 되어 있다. 경오일(庚午日)은 7월 14일이 된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서 장위공(章威公)의 생졸년은 942~998년과 943~998년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향년(享年)57세라는 기록과 광종11년 18세에 탁갑과(擢甲科)라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향년 57세는 착오가 적은 것으로 여겨 이에 따라 942년~998년으로 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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