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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2세조 ~ 8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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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서균 묘지명(六世 徐鈞 墓誌銘)
 

所在 : 서울 國立中央博物館(No. 新 5813)

年代 : 仁宗10年(金 天會10年, 1132)

 

1) 高麗國卒朝散大夫判將作監事致仕濮陽公

2) 徐鈞其先利川郡人大宋淳化3年成宗卽位

3) 之12年契丹伐我入北鄙上幸安北將割地以岊

4) 嶺爲關公之曾祖中書令章威公㬢‘獨發憤揮

5) □力排其議方一戰自決未幾虜折簡召元帥

6) □□難之左右無可行者公慷慨義形於色因請

7) 行奏曰臣往則彼必退矣無勞聖情乃以孑然一身

8) 冒賊百万圍中與虜帥抗衡不屈指陣人義虜

9) 爲之喪膽而遁國家至今全有西北千万里地賴其

10) 力也故家世皆以强蔭取卿相數矣而況公寬

11) 厚莊重而有守其中者猶泰山莫之能移也嘗

12) 出宰于興礼中原大率寬平淸簡邑稱其理

13) 自後國家數遣使沙汰淸濁凡經郡牧者陰相

14) 投刺獨公自若也以如彼功力之後有如是德行之實

15) 位不過卿監世所惜也然猶桑楡之晩樂其退休未

16) 嘗有歉然之色而居常樂也內尤信大慈悲藏大金

17) 天會10年壬子春秋73無疾而登假11月3日安

18) 葬于白岳山之麓祖惟傑左僕射考靖平章事

19) 妣金氏平章事元鼎女也公娶李氏給事中唐鑑

20) 之女也生男六人生女四人次序名位鏤之于

21) 背矣銘曰 徐氏之世 于列有光

22) 惟公之偉 大臣之方 言寡行敏

23) 動靜有常 陰功厚德 厥後必昌

24) 誌其髣髴 庶幾無疆

25) 長元成佛都監判官次穎觀玄

26) 化寺□紫大師恭景靈殿判

27) 官次□□□□同正次□內侍授

28) 書郞同正次□春坊公子女四人長

29) 適金□之西面判官□辛丑冬十

30) 月先公而死次適王毅前試兵

31) 部郞中次適李淑晨前內侍試

32) 尙衣直長次適高陽堅書籍店錄

33) 事孫男九人孫女七人皆幼唯長女

34) □□永□□爲春坊□使□

 

天會壬子冬十一月 日書

 

■ 參 考 ■

『海東金石苑』 補遺2, 713-716

『朝鮮金石總覽』上, 334-335

『韓國金石文追補』96(長元成佛都監 墓誌銘)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603-606

張東翼, 「高麗墓誌 4例 檢討」(『大丘史學』19, 1981)

 

 

서균 묘지명(徐鈞墓誌銘) (번역문)

 

고려국의 조산대부 판장작감사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돌아가신 복 양공서균은 그의 선조가 이천군 사람이다. 송나라 순화3년(성종11, 서기 992년) 성종이 즉위한지 12년에 거란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북쪽의 변방으로 침입하였다. 임금이 안북에 행차하여 땅을 떼어주어 절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였다. 공의 증조 중서령 장위공 희(曦, 徐熙)가 홀로 분발하여 ᤝ힘써 그 논의를 배척하고 바야흐로 일전을 벌여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오자 원수를 불렀으나 ᤝᤝ어렵게 여겨 좌우에서 가히 갈만한 자가 없었다. 공이 강개하여 의로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에 갈 것을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이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니, 성정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내 홀연히 혼자 몸을 무릅쓰고 적의 백만 포위속으로 들어가서 오랑캐의 장수와 더불어 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의(人義)를 펼치지, 오랑캐가 그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북지방의 천만리 땅을 온전하게 한 것은 공이 힘쓴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분이 대대로 강한 음덕으로 경상이 된이가 여러명이다. 하물며 공(徐鈞)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장중하니, 그 중심을 지키는 것이 태산을 능히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일찍이 흥례(興禮)와 중원(中原)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대개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니 고을에서 그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 여러차례 안찰사를 보내어 청탁을 가리게 하였는데 무릇 군목을 지내는 자들이 몰래 서로 명암을 주며 만나자고 하였으나 공만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와 같은 공력(功力)이 있는 뒤에야 이와 같은 덕행의 업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직위가 경(卿)과 감(監)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에서 아쉽게 여겼다.

그러나 오히려 만년에는 물러나 쉬는 것을 즐기고, 일찍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안으로는 불교[대자비장(大慈悲藏)]를 더욱 믿었다. 大金 天會 10년 임자년(인종10, 1132)에 춘추 73세로 벽이 없이 돌아가시니 11월 3일에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조부 유걸(維傑)은 좌복사(左僕射)이고, 아버지 정(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원정(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와 결혼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당감(唐鑑)의 딸이다. 아들 여섯명과 딸 네 명을 두었으니, 그들의 순서와 이름은 뒷면에 새겼다. 명(銘)하여 이른다.

 

서씨의 세계는 대대로 빛났지만

오직 공이 뛰어나 대신의 방략이 있었다.

말이 적으나 행동이 민첩하고 기거 동작이 일정하였다.

공적을 감추고 덕을 후하게 하니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그 모습에 비슷하게 지(誌)를 지었으니

무궁하에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뒷면 큰아들 원(元)은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고, 차남 영관(潁觀)은 현화사(玄化寺) ᤝ자대사(ᤝ紫大師)이며, 3남 공(恭)은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이며, 4남 ᤝ는 ᤝᤝᤝ同正이며, 5남 ᤝ는 내시수서랑동정(內侍授書郞同正)이며, 6남 ᤝ는 춘방공자(春坊公子)이다. 딸은 네명인데, 장녀는 서면판관(西面判官) 金ᤝ之에게 시집갔으나 신축년(예종16, 1121) 겨울 10월에 공 보다 앞서 죽었다. 2녀는 전시병부랑중(前試兵部郞中) 왕의(王毅)에게 시집갔고, 3녀는 전(前) 내시시상의직장(內侍試尙衣直長) 이숙신(李淑晨)에게 시집갔고, 4녀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 고양견(高陽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9명, 손녀는 7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만 장녀 ᤝᤝ永ᤝᤝ春坊이 된다.

 

천회임자년(天會壬子年)(仁宗10,1132)겨울 11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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