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내의령 서필 신도비명 병서

by 이천서씨 posted Aug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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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내의령 증 삼중대광 태사내사령 시 정민 이천서공 필 신도비명 병서

(高麗內議令三重大匡太師內史令諡貞敏利川徐公弼神道碑銘幷序)

 

불녕(不佞)이 일찍이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을 읽다가 정민공(貞敏公) 필(弼)과 장위공(章威公) 희(熙)의 양세사적(兩世史蹟)에 이르러서 그 강의(剛毅)한 언론(言論)과 거룩한 공적(功積)에 대(對)하여 느낀바 사뭇 컸었다. 이제 그 후손(後孫) 등(等)이 그 두 어른의 묘도(墓道)에 높은 비(碑)를 세울제 불녕(不佞)에게 명(銘)을 청하였기에 삼가 먼저 정민공의 사적(史積)을 쓰기로 하였다. 公은 이천인(利川人)이요 타고난 성격(性格)이 유달리 통민(通敏)하여 처음에는 도필(刀筆)의 능(能)으로서 낮은 벼슬아치로 출사(出仕)하였으나 여러차례 승진(昇進)하여 벼슬이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다. 광종(光宗)이 일찍이 公과 재신(宰臣) 왕함민(王咸敏)과 황보광겸(皇甫光謙)에게 金으로 지은 주기(酒器)를 내렸을 때 公은 홀로 받지 아니하고 아뢰기를 “臣이 외람히 재보(宰輔)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미 성스러운 과임을 입음이 그지없는 바 이제 또 金술잔을 내리심은 더욱 분수에 넘치와 황송(惶悚)하옵기 짝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 복식(服飾)이나 기용(器用)에는 등급(等級)을 밝혀야 할 것이요 사치(奢侈)와 검소(儉素)함에는 나라의 치란(治亂)이 매인 것인바 만일 신하(臣下)로서 金그릇을 쓰게 된다면 임금께서는 장차 어떠한 것을 쓰시렵니까”하였다. 광종은 “경(卿)이 능(能)히 보물(寶物)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니 나는 의당히 卿의 이 아름다운 말로서 보배로 삼으려하오”하여 크게 감탄(感歎)을 하였다. 어느날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원컨대 임금께옵서 공로(功勞)없는 자(者)에게 상(賞)을 내리지 말고 공로 있는 이들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하였다. 광종은 묵묵히 말이 없었으나 그 이튿날 근신(近臣)을 보내어 公에게 “유공무공(有功無功)은 누구를 두고 이름이요”하고 물었다.

 

“公은 공로 있는 이는 원보(元甫)와 식회(寔會)요, 없는 者는 너희들을 일음이었는바 솔직히 이 말을 여쭈어다오”하였다. 그때 광종이 투화(投化)한 한인(漢人)을 후대(厚待)하여 신료(臣僚)의 딸과 제택(第宅)을 골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公은 “臣의 집도 약간 넓사오니 이에 바치고자 하옵니다” 하고 아뢰자 광종은 그 까닭을 물었다. 公은 “이제 투화(投化)한 사람들이 좋은 벼슬자리를 골라 차지하고 화려한 집만 찾아들고 있음으로 이 나라의 고가세신(古家世臣)은 도리어 처(處)할 곳을 잃었으니 臣의 어린 소견(所見)에 진정코 子孫의 뒷일을 위하여 꾀하건대 재상(宰相)이 살고 있는 집을 지탱(支撑)하기 어려울 것을 알았답니다. 청(請)컨대 臣이 살아있을 때 거두어주시면 臣은 미리 남은 녹봉으로서 다시금 작은 집을 세워 후회(後悔)없게 하려 하옵니다”고 대답을 하였다. 광종은 비록 그 곧은 말에 노(怒)여웠으나 마침내는 깨달은바 있어 다시금 신료(臣僚)의 제택(第宅)을 빼앗지 않았다. 또 내구(內廐)의 말이 죽으매 광종은 그 일을 맡은 者에게 문책(問責)하려 하였다. 公이 곧 공자(孔子)께서 마구(馬廐)에 불이 일었을 때 사람이 상(傷)하지나 않았나를 물었으나 말은 묻지 않았다는 고사(故事)를 이끌어서 논쟁(論爭)을 꺼리지 않아 마침내 면죄(免罪)시켰으니 그 곧음과 과감(果敢)함이 대체 이와 같았다. 公은 신라(新羅) 아간공(阿干公) 신일(神逸)의 아들이요 합천홍찬(陜川洪贊)의 외손(外孫)이다. 효공왕(孝恭王) 신유(辛酉)에 나서 고려 광종(光宗) 을축(乙丑) 7月에 졸(卒)하니 춘추(春秋)가 65歲요, 여주 상두산 묘좌(驪州象頭山卯坐)에 예장(禮葬)하였다. 정민(貞敏)은 그 시호(諡號)요 여러차례 증직(贈職)하여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에 이르렀다. 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부인(夫人)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대사간(大司諫) 윤(允)의 딸이니 묘(墓)는 쌍봉(雙封)되었다. 아간공(阿干公)이 일찍이 아들을 못두었더니 어느날 화살이 꽂힌 사슴이 앞에 뛰어들기에 그는 화살을 뽑아버리고 숨겨주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와서 이르기를 “사슴은 본시 나의 아들이라. 公의 은덕(恩德)을 입어 죽음을 면(免)하였으니 公의 자손(子孫)으로 하여금 대대경상(代代卿相)에 오르게 하리라”하였다. 그는 이상히 여겼더니 나이 여든에 비로소 公을 낳았다 한다. 과연 公과 公의 아들 장위공(章威公)과 손자(孫子) 눌(訥)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짐승에게 미친 음덕(蔭德) 갸륵하신 님을 낳아

나라에 주추되고 후손(後孫)에게 광영(光榮)일세.

찬란(燦爛)한 저 그릇이 보배될 것 없다하니

진중(珍重)하신 님의 말씀 참으로 보배일세.

왕언(王言)이 정녕(叮寧)하니 어와 성은(聖恩)이 그지없소.

상징(賞徵)을 밝게 함은 어진 임금 하는 일이

객주(客主)가 제자리에 질서(秩序)를 세운 것이

사람 짐승 경중(輕重)함도 선철(先哲)의 유훈(遺訓)이라.

오흡다 님이시어 나라 사랑 그 단충(丹衷)을

이에 길이 간직하니 초동(樵童)아 알리라

한잎의 지푸세라도 길이 길이 보호하리.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 근찬(謹撰)

김충현(金忠顯) 근서(謹書)

단기(檀紀) 4306年 10月 日

후손(後孫) 상록(相祿) 성환(成換) 준산(準珊) 근립(謹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