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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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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干公 諱 神逸 墓表

 

京畿道利川府孝養山負子之原有新羅阿干徐公神逸之墓其配陜川洪氏諱贊女盖是東國諸徐之鼻祖也謹按得姓淵源錄有曰箕子四十二代孫箕準避居利川徐阿城故其後因姓徐又云新羅開國功臣徐豆羅之后公以憲德王九年丁酉生仕羅季至阿干及國革與弟神通退居孝養山下世稱處士以敎授後學爲己任爲年老無子神通請以其子穆爲后公其獨子而不忍也遂擇配而娶焉一日公率家僮課春田有鹿帶矢奔投則拔箭傳藥覆以藳薦俄而犣子跟問鹿止公曰野獸汝一人走逐豈復入衆耦喧耕中獵者憮然而退夢一神人謝曰鹿吾子也賴公不死當今公子孫世爲宰輔果八十生一子弼官至高麗太師諡貞敏配光宗廟廷弼生熙官太保諡章威配崇義殿享雪峰書院熙生訥官太師諡元肅配靖宗廟廷其後顯敭一如神人言事載麗史及輿地勝覽櫟翁稗說而后孫利城君愈詩所謂孝養山坻始祖起有鹿帶矢匿衣中積善餘慶流萬世子孫相繼位三公者是也鳴呼公之苗裔不億其麗而名卿碩軒輊簪組煊縣則德蔭之施垂無窮矣以大官遯野自稱處士則獻靖之義保無傀矣敎迪諸生俾植風聲則倡學之功又不可該矣幽宅之護己經千餘年而尙闕顯刻關北諸孫爲是慨然倡議治石而來求余文者寅默鎭英也余惟公之德義足以扶樹世敎誠不可以泯爲故畧擧遺乘而述之如此云

 

時著雍敦祥遯月下澣

完山 崔秉心 謹撰

後孫進士 秉駿 謹書

二十八世孫 晩珠 謹堅

 

 

 

아간공 휘 신일 묘표(阿干公諱神逸墓表) (번역문)

 

 

경기도 이천부 효양산을 등지고 자, 좌의 노폭 평평한 곳에 신라 아간 서공 신일의 묘가 있으며 그의 배위는 합천홍씨 취 찬의 따님이시다.

 

대개 동국의 모든 서씨의 시조이시다. 삼가 살피건대 득성연원록에서 이르기를 기자의 42대손 기준이 난을 피해 이천 서아성에 살았으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성을 서씨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르기를 신라개국공신 서두라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공은 헌덕왕 9년 정유생으로 신라말기에 벼슬이 아간이었고 나라가 바뀌어 동생 신통과 더불어 효양산 아래에서 살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처사라 칭하였다.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노년에 이르러 아들이 없으므로 신통이 그의 아들 목을 후사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아우의 독자를 차마 후사로 삼을 수 없다 하시며 다시 취처하였다. 어느날 하루는 공이 가동을 데리고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 화살 맞은 사슴이 달려들러 오는지라 공이 화살을 빼고 약을 발라 멍석으로 덮어 놓았다. 조금 있으니 사냥꾼이 뒤 쫓아와서 사슴 간 곳을 물으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당신 한 사람에게 쫓긴 사슴이 어찌 여러 사람이 시끄럽게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오겠는가 하시니 사냥꾼은 무연히(실망하여) 물러갔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서 사례하는 말에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공의 힘을 입어 죽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공의 자손은 나라를 돕는 재상이 될 것이라 하였다. 공이 80세에 아들을 낳으니 필이다. 관직이 고려 태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민이며 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필은 희를 낳으니 희는 관직이 태보이며 시호는 장위이고 숭의전과 설봉서원에 배향되었다. 희는 눌을 낳으니 관직은 태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원숙이며 정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후로 현양(이름이나 지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냄)됨은 하나같이 신인의 말과 같이 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고려사와 여지승람 및 역옹패설(고려공민왕 때 이제현이 지은 책)에 실려 있다. 후손 이성군 유의 시에 이르기를 효양산 아래에서 시조께서 일으키셨고 화살 맞은 사슴을 옷 속에 숨기시어 적선여경(주역의문언전에 적선지가필유여경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뜻은 선한 일을 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은 만세자손에게 까지 흘러 서로 계승하여 관직이 삼공에까지 이르렀다.

 

공의 대가 먼 후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건만 널리 이름이 알려져 뛰어난 재상 학자 포의지사들의 경중 고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이어져 음덕의 드리움이 무궁하도다. 높은 벼슬을 지내다가 초야에 은둔하여 스스로 처사라 칭하였고 현정(깨끗하고 고요함)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보전함이다. 후진을 교훈하여 풍성(훌륭한 기풍/좋은 명성)을 심었으니 창학(학교/가르침을 열다)의 공을 또한 가히 속이지 못하도다. 유택을 수호한지 천여 년이 흘렀으니 오히려 현저한 각자(刻字)가 궐 하였더니 관북에 있는 제 자손들이 이 일을 개탄하고 발의하여 치석해 놓고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하는 사람은 인묵과 진영이어라. 내가 생각하기를 공의 덕과 의리가 족히 세상의 풍화와 교훈을 붙들만하여 진실로 이 사적이 세상에 없어지지 아니하기 위하여 끼친 일을 간략히 이와 같이 짓노라.

 

 

때는 무오 6월 하순

완 산 최병심 근찬

후 손 진 사 병준 근서

28세손 만수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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