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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야간공

시조 야간공

2015.08.12 17:41

아간공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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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干公 行蹟

公諱神逸羅末官至阿干即今之左議政與其弟神通退居漢川令之利川孝養山自稱處士以敎授後學爲業門徒日進戶外之屨滿焉公年七十四無嗣子而喪儷神通請以其子穆爲後公曰奪弟之一子以爲己子非人情也終不聽之門人交謁更諫於公曰先生旣不以穆爲後則百歲之後先生之廟無所依歸也不如再娶以冀嗣續也公可其言遂擇配而娶一日公率僮僕課農於春田有鹿帶箭奔投公拔箭傳藥匿之藳席之中俄而犣者跟至問鹿所之公曰野獸畏汝一人而走則豈入於衆人喧耕之中乎犣者撫然而返夢一神人來謝曰鹿吾子也賴公不死當今公之子孫世爲宰輔公年八十生一子是爲貞敏公其后子孫之顯敡果如神人之言穆之後無聞焉

아간공 행적(阿干公行蹟) (번역문)

 

휘(諱) 신일(神逸) 생(生) 817년 졸(卒) 서기 902년 서씨시조(徐氏始祖) 神逸은 신라 말엽에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으나 그 벼슬을 버리고 아우 신통(神通)과 함께(漢川 지금의 利川) 효양산(孝養山) 밑에 와서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시고 후진(後進)들을 교육하는 일을(業)으로 삼으시니 제자들은 나로 불어서 집 안팎에 가득 찼다.

공(公)이 74세일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우 신통(神通)은 자기 아들 목(穆)으로 하여금 형의 뒤를 이를 잇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는데 공은 아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빼앗아 자기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하시면서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제자들은 이 사정이 두렵고 민망하여 아뢰기를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뒤를 잇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먼 후일 선생님의 묘(廟 사당)를 누구에게 의탁하겠습니까? 다시 부인을 맞이하여 뒤를 이을 아들을 얻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하였다. 공이 이 말을 옳게 생각하여 배필을 다시 맞이하셨다.

어느 봄날 공이 동복(僮僕)들을 거느리고 들에서 농사일을 보시는데 화살 꽂힌 사슴(鹿) 한 마리가 급히 뛰어 오더니 공의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공은 불쌍히 여기시여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른 다음 멍석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뒤따라온 사냥꾼이 나타나서 사슴의 간 곳을 물었다. 이에 공은 「짐승이 그대 한사람이 두려워서 망쳤을진대 어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면서 일하는 곳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하시니 사냥꾼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어제 그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하였으니 나는 그대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어 영달(榮達)하도록 도우리라」하고 사라졌다.

그 뒤 공의 연세 80이 넘어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고려(高麗) 초기에서 재상이 되신 정민공(貞敏公)이다. 그 후 과연 신인의 말과 같이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나타났으니 목(穆)의 뒷일은 들리는 바가 없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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