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세손 난정공(懶亭公) 서지(徐祉)의 발자취
공의 이름(諱)은 지(祉), 자는 수지(綏之), 호는 난정(懶亭)이다. 세조 14년(1468) 이조판서인 익농공(益聾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호걸 같았고, 도량이 깊어 나이 열 살에 경서에 통달하였고 열다섯 살에 이미 학문이 올되어 사리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연구하고 오로지 소학절요(小學節要)를 따라 몸을 닦았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기를 오로지 충효에 바탕을 두고, 가훈을 지켰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모두가 올바른 군자라고 칭송이 대단했다.
당시 점필재(佔畢齋) 문간공(文簡公) 김종직이 호남지방을 순찰하며 인재를 골라 중앙에 천거하던 중 공의 형제를 보고 크게 칭찬하기를 「이들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로다. 내 남도에 와서 이러한 인재를 처음 보았노라」고 하였다. 연산군 원년(1495) 생원에 합격하고 연산군 4년(1498) 식년시(式年試) 갑과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임종 때 아버지가 충효를 잊지 말라는 분부를 받고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애절하게 거상하니 먼데 사람과 가까운데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효성이 이만하면 뒷날 복을 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연산군 12년(1506) 이조정랑(정5품)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는 연산군이 왕이 된 뒤 10년 남짓 되었는데 정사가 어지럽고 왕실과 나라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문정공 유순정(柳順汀)이 공을 한 곳으로 드러나지 않게 모신 뒤 박육(博陸) 땅의 제후 곽광(藿光)에 대한 전기를 배우고자 하자 공이 사양치 않고 일러주니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그 뒤 여러 중신들과 뜻을 함께 중종반정을 꾀해 연산군 12년 박원종(朴元宗) 등이 장사를 시켜 신수근을 죽이고 반정을 성공시켜 같은 해 9월 2일 중종이 즉위한다. 그 뒤에 신씨(신수근의 딸이며 중종이 즉위하기 전 부인)를 왕비로 책봉하고 군신들의 축하를 받았는데, 다음날 유순과 김수동 등이 계(啓)를 올려 왕비를 자리에서 몰아냈다.
그 뒤 10년이 지난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돌아가시고 왕비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임금의 자문에 따라 내친 신씨를 다시 왕후자리로 올리도록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사간 이행과 대사헌 권민이 옳지 않다고 하며 이들의 벼슬을 깎고 귀양 보내야한다고 나서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광필과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박상과 김정의 상소문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말이 들어맞지 않을지라도 죄를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되면 충성으로 간하는 길이 막혀 백성들의 뜻을 모을 길이 없습니다」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안강도 몹시 분하게 여겨 임금 앞에 나아가 「박상과 김정이 임금의 본분에 대한 보고를 정성껏 했는데도 도리어 이를 엄하게 꾸짖으니 이는 충성으로 간하는 길을 막아버리고 어진 신하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으로 오랫동안 두고두고 비방거리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또 듣지 아니하였다. 공이 정광필, 안강, 김안국, 이장곤, 기준, 박세희, 조광조 같은 분들과 더불어 친분이 두터워 마음을 주고받던 처지인데 박상과 김정 두 사람이 귀양가게 되매 모두 이를 구하고자 하다가 같은 당파로 취급받아 내침을 받았다.
이용제가 일찍부터 공과 사귄 정분이 두터워 서로 허물 없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일이 있는 후 공을 보고 「나라가 병들어 말라 죽게된 것도 모르고 억지로 이를 고치려 하는가」라고 농담을 하였다. 공이 바르고 깨끗한 언론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관직을 내놓고 철야(鐵冶)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와 둥근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난정(懶亭)이라 붙였는데 벼슬하기를 게을리 한다는 뜻이다. 박상이 남평 오림역에 귀양와 있었는데 오림과 철야는 10리 되는 곳이기 때문에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어 산책 삼아 서로 왔다갔다하였다. 그랬더니 그때 사람들이 공더러 스스로 귀양살이한다고 비웃기도 하였다.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 중종 15년(1530) 사간원 대사간(사간원에서 으뜸가는 정3품)이 된 뒤, 전라도병사회영(全羅道兵使會寧) 부사에 이어 중종 19년 황해도 관찰사, 중종 20년 사헌부 대사헌(종2품), 중종 26년 대호군, 중종 27년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중추부의 종2품) 겸 성균관사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중종 28년 한성 판윤, 중종 29년 전라도관찰사, 중종 31년 공조판서(정2품)에 이어 이조판서(정2품)를 역임하다가 중종 32년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같은 해 11월 15일 일흔 살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 현(縣) 남도천 구봉산 신(申)좌 들판에 모셨다.(본문에 나온 벼슬은 중종실록에서 뽑았다).
(이천서씨 난정공파보 행록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