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세손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의 발자취
서필은 이천(利川) 사람인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처음 도필(刀筆, 관에서 문서 기초를 잡는 낮은 관리)로 진출한 뒤 계속 벼슬이 높아져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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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이 재상 왕함민(王咸敏), 황보광겸(皇甫光謙), 서필(弼)에게 금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리셨는데, 서필만 홀로 “신이 재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서 은총만 입고 있었는데 다시 금으로 만든 그릇을 내리시니 더욱 황송하고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또한 의복과 그릇이란 차례를 분명히 해야 하고, 사치하느냐 검소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질서에 관계되는 일인데 신이 만일 금으로 만든 그릇을 쓰면 임금께서는 앞으로 무엇을 쓰시겠나이까」라고 하며 받지 않으니, 광종이 ”경은 보물을 보물로 삼지 않으니 나는 경의 말을 보물로 삼을 것이다」고 하였다.
(임금을) 찾아가 뵙고 “공이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 마시고, 공이 있는 사람을 잊지 마십시요”라고 아뢴 적이 있었다. 광종은 아뭇소리 않고 있다가 이튿날 가까이 하는 신하를 보내 ‘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공 없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공 있는 사람은 원보(元甫) 식회(式會)를 말하는 것이고, 공 없는 사람이란 (바로) 너희들을 가리키는 말이니 (반드시) 이대로 아뢰어라”고 대답하였다.
한 때 광종이 투항하여 귀화한 한인(漢人)들을 후대하여 신하들의 살림집과 딸을 골라 나누어주었다. 하루는 필이 “신이 사는 집도 제법 넓으니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광종이 그 까닭을 묻자, “지금 귀화한 사람들이 (좋은) 벼슬자리를 골라 차지하고 (좋은)집을 골라 살고 있는데, 대대로 국록을 받는 신하들은 오히려 옛집을 잃은 사람이 많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자손들의 뒷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재상이 살던 집은 자기 소유가 아니니 신이 살아있을 때 거두어 주시면, 신은 남은 녹봉으로 다시 작은 집을 지어 후회가 없도록 하겠나이다”고 대답하였다. 광종은 화가 났으나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
또 궁중에서 키우는 말이 죽어 광종이 그 일을 맡은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하자 필이 공자가 (마굿간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물었지)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강력하게 간하자 그 사람을 용서해주었다. 그는 이처럼 거리낌없이 바른말을 하였다.
광종 16년(965년)에 돌아가시니 65세였다. 시호를 정민(貞敏)이라 하고, 여러 차례 벼슬을 높여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를 내렸다. 광종 묘정(廟庭)에 위패를 모셨다. 염(廉)∙희(熙)∙영(英) 세 아들이 있는데 서희는 따로 열전이 있다.
(고려사 권 93, 열전 권 제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