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를 말할 때 흔히들 기(奇)·고(高)·박(朴)이라 하기도 하고, 박(朴)·고(高) 기(奇)라고 하기도 한다. 기·고·박은 기대승-고경명 3부자-박상과 박순 일가를 가르킨다.
이번 호에는 충주박씨의 560년 터전인 광주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을 찾았다. 광산구가 광주광역시에 편입되기 전에는 광산군 서창면 절골이었으며 옛 이름은 방하동(芳荷洞)이다. 방하동이란 이름은 마을 앞에 큰 연방죽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방하동 인근에 계성서씨(이천서씨)들의 집성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에서 남평으로 가다가 백마교차로에서 왼쪽 길로 오르는 마을이다. 교차로 바로 오른쪽에는 구산 김규환의 재실인 구산재(龜山齋)가 있다.
이 절골마을은 충주박씨 10세 찬성공(贊成公) 지흥(智興)이 1456년 세조 찬탈에 반대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 백마산 자락에 정착한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서 서종하의 딸 계성서씨와 혼인하여 하촌공(荷村公) 정(禎), 문간공(文簡公) 상(祥), 육봉공(六峯公) 우(祐)를 낳았다. 이들의 문장이 뛰어나 소동파의 삼소에 견주어 ‘동국삼박(東國三朴)’이라고 부른다.
박정은 1467년에 방하동에서 출생하여 1482년 사마시에 합격, 성균생원이 되어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종직(金宗直)과 종유(從遊)하였다. 선생께서 두 동생을 훌륭하게 가르쳐 중국 삼국시대의 마량 형제에 비유하여 세평하기를 백미지량(白眉之良)이라 하였는데 안타깝게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28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고, 육봉(六峰) 박우(朴祐)는 대사성을 지냈다. 박우의 차남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은 장원급제하여 대제학을 거쳐 14년 동안 정승 벼슬에 있었다. 박상과 박우, 그리고 박순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하면서 사화(士禍)의 혼란 속에서도 선비의 절의를 지킴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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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선생 제각 봉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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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역의 도로명으로 눌재로와 사암로를 정한 것도 깊은 뜻이 있다, 눌재로는 광주 벽진동 극락교 부근에서부터 남평까지를 이르고, 사암로는 광주공항 부근에서 광산IC까지다. 훗날 같은 충주박씨 후손인 용아 박용철을 기리는 용아로(금호타이어~용아생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신라 경명왕의 후손 박영이 貫祖
대한민국의 박씨들은 신라를 창건한 박혁거세를 원조로 한다. 이후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박언침(朴彦㎑)이 밀성박씨(밀양)의 관조가 되고 다섯째 아들 언창(彦昌,사벌대군)의 후손 박영(朴英)이 고려시대에 부정의 벼슬길에 오르면서 충주박씨 관조(貫祖)로 모시게 된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점령하여 진흥왕 때 소경(작은 서울)이라 하였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8세 광리(光理)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진(媤)이 참의공파, 3남 소(蘇)가 판서공파를 이룬다. 참의공 진의 장남 효함이 강릉공, 2남 충함이 참판공, 3남 제함이 제주공, 4남 신함이 집의공이라 부르고 소의 장남 인흥을 홍원, 2남 의흥을 참의공, 3남 예흥을 맹산, 4남 지흥을 찬성공으로 부른다.
지흥의 세 아들이 정(禎) 상(祥) 우(祐)이다. 우의 아들이 개(漑)와 순(淳)이며, 순은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두었는데 일찍이 칠서사건(七庶事件)으로 목숨을 잃었다. 칠서사건이란 7명의 서자들이 관계에 진출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세력을 모았다가 붙잡힌 일을 말한다.
절골에는 눌재 박상의 신도비와 봉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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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선생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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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에는 입향조인 지흥과 큰아들 정의 묘역과 재실, 문간공 눌재 상(祥)의 묘역(1837)과 신도비(1859), 봉산재와 생가터 등이 있다. 절골은 지흥이 입향한 뒤 560년 동안 충주박씨 자작(自作)마을이 되었다. 도랑 입구에 산기슭에 충주박씨 천(阡)이라 새겨진 바윗돌이 있는데 이는 1918년 눌재의 12대손인 성주가 충주박씨의 세거지를 알리기 위해 새겼다고 전한다.
절골은 송학산자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마을 가운데로 흐른다. 이 물줄기를 따라 오르다 보면 눌재 박상을 모시는 재실인 봉산재와 찬성공 재실인 추원재, 박정의 재실인 추모재 등이 있고 <영산홍> <백일홍> <해당화>를 노래한 눌재 박상의 시비가 곳곳에 세워져 운치를 더해 준다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왼쪽 언덕에 1859년에 세운 눌재의 신도비가 있다. 박상의 재실인 봉산재는 지난해 새롭게 중수했으며 마당에 윤구 선생이 쓴 비문도 새롭게 각하여 세워 놓았다. 봉산재 뒤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박상의 묘소로 가는 길이 나온다. 70여m를 오르면 봉산등에 정부인 진양유씨의 묘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봉산재에서 300여m를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박정의 묘소가 있고 바로 길가에 찬성공 재실인 추원재(追遠齋)와 큰아들 박정의 재실인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8월 중순에 찾아간 재실에는 백일홍 몇 그루가 곱게 피어 아름답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다시 산길을 오르면 오른쪽에 죽산 안씨 재실이 있고 건너편에 찬성공 지흥과 부인 계성서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지흥이 절골에 내려와 서종하의 둘째 딸과 결혼했고 서종하의 큰딸은 죽산안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계성서씨의 유산이 큰딸과 작은딸에게 상속돼 오늘에 이른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충주박씨와 죽산안씨들은 같은 서씨 할머니를 모신 까닭에 유달리 가깝게 지낸다.
선비의 절의 지킨 눌재 박상
눌재 박상 선생은 호남선비를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인물이다. 1474년 5월 18일 절골에서 태어나 1496년(연산군 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전라도 도사, 순천. 담양부사, 상주·충주·나주목사를 지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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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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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장과 충절이 뛰어난 선비로서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불의와 부정을 보면 상소를 주도했으며 청렴하고, 직무에 충실해 염백리(廉白吏)에 뽑히기도 했다.
눌재 박상 선생의 재실(齋室)로 들어가는 문 위에 완절문(完節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그가 관직과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훈구파와 왕의 인척들을 비판하고 정론을 펼쳤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눌재의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496년 진사가 되고, 연산군 7년(150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박사를 거쳐 승문원 교검·시강원 사서·병조좌랑을 역임하고 전라도사를 지냈다. 약 25년여 간에 걸친 관직생활을 하면서 너무 공정하고 청렴하여 미움을 받기도 했으나 훗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그는 중종 초에 사간원 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된 바 있다. 또 1515년 담양부사로 있을 때는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군수 유옥과 함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박상은 오림역(나주시 봉황면 오림리 원오림마을)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순천 강천산에는 이들이 모여 단경황후 신씨 복위를 상소하고 3개의 관인을 걸어두었다는 삼인대(三印臺, 전북무형문화재 제 27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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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재 정문 완절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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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유옥과 함께 3개의 관인을 걸어둔 삼인대
조선 중기 이전 우리나라는 이른바 훈구세력(勳舊勢力)에 의해 지배되었다. 훈구세력이란 이성계와 함께 조선왕조를 창건한 개국공신과 세조의 쿠데타에 의해 공을 세운 사람들, 그리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국가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들이 부패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이른바 사림(士林)이다.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정몽주와 길재로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복하여 낙향한 선비들이 후학들을 길러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1515년(중종10년) 담양부사로 있던 눌재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씨복비소(愼氏復妃疏)를 왕에게 올리게 된다. 1506년(연산군12년) 박원종·성희안 등이 주동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박원종 등은 좌의정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고 하여 숙청하고, 신수근의 딸인 중종의 비 신씨를 폐위시켰다. 중종은 윤여필의 딸 정경왕후와 재혼했으나 왕자를 낳고 사망했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로 있으면 자신들이 위태로워질 것이 뻔해 왕을 압박해 폐비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박상 등은 폐비 신씨는 아무 잘못이 없으므로 복위시키고 박원종·성희안 등을 국모 폐출의 죄를 물어 관직을 추탈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대간 이행(李荇) 등의 횡포로 결국 유배에 처하게 된다. 상국(相國) 정광필(鄭光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극형은 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200년 후에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왕후에 추증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순창의 삼인대는 대의를 지키려는 선비들의 정신과 충정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비각에는 영조와 정조의 어제 현판과 기우만이 쓴 삼인대 비각 중수기가 있다.
삼인대 상소가 사림 결집 계기
이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약화되었던 사림이 다시 결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권력자의 의지에 반하는 주장은 자칫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엄혹한 시대였음을 감안할 때 매우 의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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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재 박상과 정부인 진양유씨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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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1505년(연산군11년) 전라도사로 있을 때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애첩의 아비인 ‘우부리’라는 자가 권세를 등에 업고 토지를 빼앗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온갖 비행을 일삼고 있는 것을 보고 장살(때려죽임)해버린 일도 있었다. 사실 죽이지는 않고 혼을 내주려다 생긴 일이지만 왕의 장인뻘이 되는 자를 잡아 죽였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고양이 전설’이란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박상은 연산군에게 보고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악착같이 길을 막아섰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정양사에서 며칠을 묵게 되는데 그 사이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물러나게 된다. 박상은 그길로 하산했고 곧 중종이 불러 정5품 사간원 헌납이란 요직을 맡게 된다. 훗날 정읍에 있는 정양사에 땅을 기증하게 되는데 그 땅의 이름을 ‘묘답(고양이에게 밥을 먹여 살리라는 땅)’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박상은 기묘사화 때는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었기에 화를 면했는데, 조광조의 죽음을 전해 듣고 통곡하였다.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 올 때 광주 남문 밖에 10여리에서 맞이하였고, 이듬해 용인 십곡리로 관이 갈 때 배웅을 하였다.
기묘사화로 조광조·양팽손·최산두 등의 사림들이 화를 입자 박상은 충주 목사로 부임하여 김안국·김세필 등을 후원해주었다. 당시 산림처사를 자처했던 성수침(1493~1564) 성운(1497~1579) 양산보(1503~1557) 정렴(1506~1549) 이지함(1517~1578) 최영경(1529~1590) 정개청(1529~1590) 성혼(1535~1598) 등이 은둔에 들게 되는데 양산보는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은거하게 된다.
이쯤에서 박상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이 글은 좌의정을 역임한 심정(沈貞)의 별장인 소요당에서 쓴 시로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題逍遙堂排律四十韻〕」이다. 풀이는 눌재와 사암의 한시 작품을 연구하고 있는 박명희 박사(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가 하였다.
심정은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한 인물이며,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상의 입장에서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심정이 자신의 별장인 소요당에 지인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각자 시를 지은 것 같은데, 이때 박상도 작품을 남겼으리라. 전체 분량이 40운이기 때문에 짧지 않은 시이다.
처음에는 소요당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주변의 승경은 어떠한가를 읊었다. 그런데 중간쯤부터는 박상이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적었다. 특히, “산 중턱엔 안주상 늘어놓았고, 가을 골짝은 술잔과 바리 펼쳤다.”라는 부분은 진정한 사심을 드러낸 말로 심정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하였다. 그 외의 내용도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은근히 심정을 비꼰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임금이 “눌재가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극찬한 것은 올곧고 강직함에 근거한다.
赤縣陽川境(적현양천경) / 적현과 양천의 경계에서
臨流翼瓦孤(임류익와고) / 물 가까이 외로운 날 듯한 기와
茸茸묘草莽(용용곤초망) / 더북더북한 풀은 깎고
??控江湖(요요공강호) / 끝없이 넓은 강물 눌렀다
(중략)
檻外홄홄層(함외양양익) / 난간 밖에선 배가 훨훨 날고
챵前濊濊?(첨전예예고) / 처마 앞에선 그물이 퀄퀄대며
半山排案俎(반산배안조) / 산 중턱엔 안주상 늘어놓았고
秋壑闢樽孟(추학벽준맹) / 가을 골짝은 술잔과 바리 펼쳤다
氣似軒冥漠(기사헌명막) / 기세는 한없이 드높고
身如坐킻圖(신여좌화도) / 몸은 그림 속에 앉은 듯하며
玉盤分內膳(옥반분내선) / 옥 소반엔 궁중 반찬 나뉘었고
黃ß賜宮壺(황파사궁호) / 노란 보자기엔 궁중 술 내렸다
蓴菜羹香滑(순채갱향활) / 순채 나물 향기로우며 부드럽고
?鮮膾腹됴(노선회복유) / 농어회는 두텁고 기름지며
?奔飛粉屋(타분비분옥) / 악어는 도망쳐 회벽 집에서 날고
驪舞吐神珠(여무토신주) / 여룡은 춤추며 신령한 구슬 토한다
?챉聞鮫館(초저문교관) / 명주 북소리 교인의 집에서 들리고
魚梁見國租(어량견국조) / 어량엔 나라 조세 물고기 보이며
湘妃츌帝瑟(상비갱제슬) / 상비는 순 임금의 거문고 울리고
漢女唱巴謳(한녀창파구) / 한나라 여인은 파촉 노래 부른다
花月窮良夜(화월궁량야) / 꽃 위의 달은 좋은 밤 새도록 떴고
薰風滌畏敲(훈풍척외고) / 훈훈한 바람은 세찬 소리 씻으며
嘶링秋淅瀝(겸가추석력) / 갈대는 가을에 우수수 소리 내고
蘭若雪햁糊(난약설모호) / 난초와 두약은 눈 속에 어렴풋하다
四氣自相奪(사기자상탈) / 사시의 기후는 절로 서로 바뀌는데
高懷何處輸(고회하처수) / 고고한 마음은 어디로 보낼 것인가
퇕?굻鰐窟(휴우문악굴) / 눈을 치켜 떠 악어 굴을 찾고
凌퍯?雲衢(능려탕운구) / 세차게 구름 거리를 질러가거늘
(생략) / 『눌재속집』권2 : 박명희 박사 번역
정조 때 불천위에 명해지다
눌재가 남평 오림역에 유배되었을 때 자주 만난 사람이 봉황의 난정공(懶亭公) 서지(徐祉, 1468-1537)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낸 인물로 ‘난정원운(懶亭原韻)’이란 시를 남겼다. ‘난정원운’이란 문집에는 박상, 김안국 등과 주고받은 우국충정의 글이 여러 편 들어 있다. 눌재는 이 일로 조광조 선생으로부터 단경왕후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는 충언이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눌재는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4대가로 칭송을 받았다. 광주 월봉서원(月峯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눌재집』8권이 있다.
『눌재집』목판각은 원집 7권, 속집 5권 도합 12권으로 되어 있다. 초간본은 1547년(명종2)에 문인 임억령(林億齡)이 금산(錦山) 임소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김수항(金壽恒)이 전남 영암으로 유배되었을 때 6대손 박정(朴晶)에게 유고를 얻어 당시 전라 감사에게 간행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김수항이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화를 당하자 간행이 중지되었다가 5년 뒤인 1694년에 전라 감사 최규서(崔奎瑞)가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다시 1841년(헌종7)에 재변이 있어 광주목사 조철영이 중각(重刻)하고 이어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도합 18편이 되었다. 현존 목판각은 1판 2면의 양면 판으로 1판에 4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으며 크기는 일정치 않다.
문간공이란 시호는 사후인 영조 5년에 받았으며 순창 삼인대는 1744년(영조20)에 세워졌다, 그리고 불천위에 명해진 것은 1795년(정조19)이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5대가 지나도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14년간 두 번의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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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 박순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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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은 전라도 입향조 지흥의 손자이자 한성부 좌윤(左尹) 박우의 아들이며 눌재의 친조카이다. 어머니는 당악김씨(棠岳金氏)인데 당악은 해남의 옛이름으로 해남김씨라고도 부른다.
당악김씨는 외할아버지가 고려말 해남으로 내려왔다가 나주 왕곡면 송죽리로 이거해 왔는데 박우가 장가들어 처가에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박순의 나이 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돼 광주로 올라와 서모에게 양육되었다.
권력 앞에서 당당했고 백성들 앞에서는 청렴했으며 선비로서 겸손했고 인재를 탕평하려 했던 대신(大臣), 선비, 문인 박순 선생. 그는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자 명종의 외숙으로 을사사화를 자행해 영의정에 오른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의 탄핵을 주도했다. 또 공직생활이 청렴해 청백리로 지정되었으며 큰 벼슬자리를 선배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진정한 선비였다. 벼슬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66세의 퇴계 이황이 종2품 제학으로 재직 중에 44세의 박순이 정2품 대제학으로 제수되자 나이와 학문을 이유로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요청했던 것을 일컫는다.
또 박순은 당쟁으로 탄핵 상소를 받았던 율곡 이이를 옹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옳은 사람을 옳다고 말할 줄 아는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딸이 출가해 살고 있던 오늘날 경기도 포천 지역인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집을 짓고 은둔하다 6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박순에 대해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곧은 절의와 지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찬사했다.
박순은 18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해 아버지의 임지였던 개성에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당시 서경덕은 1540년 김안국에 의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었던 판인데 유일지사는 초야에 있는 선비를 찾아가서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이었다.
박순은 1553년(명종8) 31세 때 정시에 장원 급제했는데 명종이 갑과 주관 답안을 보고 감탄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이조좌랑(정6품) 홍문관수찬 교리(정5품) 1556년 검상(정 5품) 사인(舍人. 정4품), 홍문관, 응교(정4품) 등의 성균관사성,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는 등 약 35년간 조정에 있었다
1561년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로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임백령은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시킨 사람이다. 사암은 임백령의 시호를 내리는 데 반대하다가 ‘분명한 오랑캐’라는 뜻의 소이공((昭夷公)으로 지어 윤원형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윤원형은 임백령의 시호를 문충공으로 지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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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 박순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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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령은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란(靖亂) 위사공신 1등에 책정되고 숭선군에 봉해졌다. 금산군수로 있던 그의 친형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임백령이 원종공신 녹권을 보내오자 불태우고 해남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임억령은 금산, 담양 등의 지방관을 거쳐 강원감사를 지냈다. 임억령은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사암은 이 사건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돌아왔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그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4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박순은 화담 서경덕(徐敬德) 문하로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당시 서경덕에게 공부한 사람이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 토정 이지함(1517~1578) 등이다.
중년에는 남명 조식과 이황(李滉)을 사사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思菴集)』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 양보
사암은 참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1568년 선조가 그에게 정2품 대제학 자리를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23살 많은 퇴계 이황(1501~1570)을 천거한다. 당시 퇴계는 종3품 대호군 관직으로 큰 벼슬이 아니었다. 퇴계도 그 자리에 앉지는 않았지만 훗날 박순에게 고마운 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진다.
남인이었던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암능양(思菴能讓)’이라는 말로 박순을 극찬했고 노론에서도 박순을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박순은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는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조정에 계속 추천하고 그들을 등용하여 도덕정치를 하라고 선조에게 극구 권장했던 사람이다. 그는 사임 상소를 다섯 번이 올렸을 정도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아름다워라! 사암의 어짊이여!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하도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의욕만 멋대로 부리며 이런 일을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哉 思庵之賢 足以範俗 奈今之利欲肆行無人觀效何 噫)”라고 글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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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 옥병서원에 있는 문충공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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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장가로서도 탁월했고, 성리학에도 깊은 학문을 보였지만 특히 시에 뛰어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박순은 생전 6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이황 임억령 송순 양사언 정운룡 백광훈 김천일 이후백 한호 남언경 등에게 보낸 편지시도 많이 남아 있다.
박순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은 1652년(효종 3)에 6권 2책으로 초간되었고, 1857년(철종 8) 7권 3책으로 중간되었다. 『사암집』에서 부록 등을 제외한 본집은 모두 4권인데, 이 중 박순이 남긴 시가 3권을 차지한다. 박순의 시는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짓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순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묘는 1589년 조성되었으며 신도비는 송시열이 썼다. 옥병서원, 월정서원 화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화곡서원은 1609년 스승인 서경덕과 박순, 민순 허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배향하고 있으며. 화곡이라 사액되었다. 월정서원은 1659년 박순의 학덕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창건했으며 1669년 사액되었다.
사암이 별세하자 수많은 인사들이 만시(輓詩)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성혼의 ‘만사암(挽思菴)’이란 시가 가슴 절절하다.
世外雲山深復深(세외운산심부심)
세상밖의 백운산은 깊고 또 깊더니
溪邊草屋已難尋(계변초옥이난심)
시냇가의 초가집 다시 찾기 어렵겠네
拜鵑窩上三更月(배견와상삼경월)
배견와 지붕위에 뜬 삼경의 달은
應照先生一片心(응조선생일편심)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어 준다네
청음 김상헌은 “ 선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기운이시고 국가의 보배이며 사림이 종장(宗匠) ”이라고 슬퍼했다. 임란 4충신으로 불리는 중봉(重峰) 조헌(趙憲)도 크게 슬퍼했다고 전한다
唐風의 시세계 확립… 三唐시인 길러
사암이 퇴계 이황선생이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갈 때 전송하는 시가 있는데 박명희 박사의 번역문을 게재한다. 이황은 당시 조야에서 존경을 받았다. 특히, 선조는 1568년 왕이 된 뒤에 이황을 부왕의 행장 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병 때문에 귀향하였다. 이후로도 이황은 선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의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의 「사잠四箴」등을 진강하였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2)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승구에서는 이황이 고향이 그리워 한 필의 말을 타고 한양을 떠나는 모습을 그렸다. 전·결구에서는 계절은 아직 완전한 봄이 되지 않아 추위 때문에 막 피어나려던 매화가 꽃봉우리를 피우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이황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황은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를 시제 삼아 총 75제 106수의 작품을 남겼다. 머문 매화가 이황을 기다린다는 생각을 한 이유도 박순이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박순은 이황이 세상을 뜬 뒤에 「퇴계 선생의 만시」를 남겨 추념하였다.
送退溪先生還鄕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 선생을 전송하며)
鄕心未斷若連環(향심미단약련환)
구슬을 꿴 듯 고향 마음 끊이지 않아
一騎今朝出漢關(일기금조출한관)
한 필 말 타고 오늘 아침 한양 떠나신다
寒勒嶺梅春未放(한륵령매춘미방)
추위로 봄 풀리지 않아 고개 매화 멈췄는데
留花應待老仙還(유화응대로선환)
머문 꽃은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라
『사암집』권1 소재(박명희 박사 번역)
연파처사 박개
사암에게는 위로 형이 한사람이 있는데 훗날 연파처사로 불린 박개(朴漑,1511~1586)이다. 그는 18세 때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과장(科場)에서 시험 보러 온 사람들이 몰려 압사를 당한 것을 보고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50세 무렵부터는 배를 타고 영산강을 오르내리며 거문고를 켜며 살았다고 한다.
젊은 선조 임금도 흥미를 느꼈던지 정승이던 박순을 졸라 데려오도록 했다, 선조는 옛날 동진의 재상 사안을 생각하며 관심을 보였는데 왕이 보내는 사람을 계속해서 되돌려 보냈다. 선조 임금이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사양하다가 60이 넘어 한성부 참군(정7품) 고산현감, 통정대부(정3품)에 오른 뒤 김제 군수로 1년간 머물다가 다시 나주로 돌아와 청풍명월을 벗 삼아 지냈다.
박순은 사림으로서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과 뜻을 같이하다가 서인으로 몰려 탄핵되었다. 이후 충주박씨 가문의 선비들은 대부분 노론 기호학파다. 19세기 세도정치로 들어서면서 충박도 중앙에서 멀어져 대과 합격은 고종 때 광주·전남에서 1명 (박용주, 1888년 식년시 병과) 나왔을 정도이다.
또 하촌공 박정의 7세 후손 가운데 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가 있다. 하동(세하동 동하마을)에서 태어나 26세 때 진사에 합격했는데 성균관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나 패악한 시대를 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노년에는 벽진동에 주곡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지냈으며 필사본 주곡집과 정초본 주곡유고가 전한다.
눌재와 사암의 영정 모시는 송호영당(松湖影堂)
광산구 소촌동 산 85번지에 있다. 송정리 한전에서 송정중앙초등학교쪽으로 600여m를 가다가 철길을 따라 좌측으로 100m 정도 직진하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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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영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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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영당은 눌재와 사암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 후손들이 영조 4년(1728년) 절골에 세웠는데 1839년 이곳으로 옮겼다. 눌재집 판본은 원래 정종의 명으로 광주향교 명륜당에 보관해 왔으나 1837년 화재가 발생해 전소하는 바람에 당시 광주목사이던 조철영이 1839년 공위십팔편 등을 복각하여 송호영당에 보관하게 되었다. 1998년 효자각을 건립하였다.
초상화의 원화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크기는 가로 100×170cm이며 그린 사람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16세 기 국내 초상화 가운데서는 인물묘사나 복식 등에서 뛰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영당의 기단은 시멘트 기단 위에 중앙은 영정 봉안 장소로 사용되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만들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이며 창호는 분합문이며 빗살(교살)로 되어있다. 송호영당에는 사암과 눌재의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광주시립역사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상태이다.
가까운 곳에 눌재의 15대 후손으로 현대시문학의 큰별 용아 박용철의 생가가 있다.
임란의병 박희수·대수·지효
충주박씨 가문에서는 임진왜란 때에도 눌재 박상의 손자인 희수(希壽)와 박정의 손자 대수(大壽)가 함께 싸움터에 나갔고, 대수의 자 지효(之孝)는 남평현감으로 지석강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끌려갔던 백성 300여명을 귀환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특히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에게 학문을 배웠던 희수는 광주에 의병청을 차리고 고경명을 추대하여 좌도대장으로 삼고, 박광옥을 맹주로 삼아 함께 했다. 이때 희수는 집안의 자녀들 60여명을 모으고 야식 80섬을 내어 종매서(從妹퀯) 송재민과 함께 전 부사 김천일을 우도대장으로 삼아서 호서 의병장 조헌(趙憲)과 양호(호남과 호서)를 막아낼 계획을 세웠다.
희수는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광주 목사 권율, 재종형 대수와 함께 금강으로 달려가 이강에게 항의하고 박광옥과 논의하여 고을의 자제 500여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보내 수천 명을 모아 권율에게 배속시켰다. 이에 권율이 동복현령 황진과 함께 보령군 남포면 웅천면 고지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편 희수는 음직으로 후릉 참봉을 지냈고 능성부참군, 군기사주부, 형조좌랑 등을 하사받았으며 임란이 진정되자 함열현령을 지낸 바 있다.
수많은 근현대 유명인사 배출
충주박씨의 가훈은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孝 世守敦穆)’이다. 나라사랑과 효도를 다하고 서로 배려하고 화목하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가운데 문과 20명, 무과 8명 등이며 사마시 합격자도 40명이나 된다. 후손들이 가훈을 따름인지 근현대 들어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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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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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파 박종률 회장(눌재 16대손)은 “향후 절골마을에 눌재 할아버지의 의리사상을 알리는 시문학교육관을 설립하여 눌재 할아버지의 절의와 시문학에 대한 산실이 되었으면 합니다.”고 밝혔다.
찬성공 후손으로 광주·전남 출신 유명인사는 다음과 같다.
박흥규, 박종태, 박종웅 등이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특히 대학교수를 많이 배출했다. 서울대 박홍규, 전남대 박하욱 총장을 비롯해 전남대 박혜령, 박하인, 박흥철, 박종근, 박종철, 박종률, 박정수 교수, 그리고 조선대 박환규, 박석철, 박종민, 전북대 박준범, 충남대 박상록, 한국외국어대 박종평, 일본 게이오대 박철수, 미국 하와이대 박형수. 심리학박사 박종석 등이 있다. 또 재계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유한켐벌리사장 박영규. 육군 준장 박진규. 법조계 하랑 법무법인 대표변호사 박종훈. 의료계 광주 학문외과원장 박하송. 부산 이비인후과 박하풍. 목포 경희약손한의원장 박지식. 프로기사 박정환. 사진작가 박하선. 청소년 연극연출가 박은서 등이 있다.
이번 취재의 자문은 박환규(찬성공문중 고문) 박종률(문간공문중 회장) 박종교(하촌공문중 이사) 박종온(하촌공문중 총무)등이 맡았다.
글 : 지형원<문화통 발행인> / 사진 : 임철진<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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